[Special Interview] 김준권 판화가 “고산자 김정호 정신 이어 한반도 가진 정서와 역사 담고 싶다”
[Special Interview] 김준권 판화가 “고산자 김정호 정신 이어 한반도 가진 정서와 역사 담고 싶다”
  •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김재성 사진기자
  • 승인 2022.05.2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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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목판화만이 가진 정통성 존재해
팬데믹 시기,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 변화케 해
수작업 ‘목판-화선지-먹의 배임’만의 독특한 정서 추구
80년대 시대 상황이 이끈 판화의 길
김정호와 케테 콜베츠가 내 작업의 정신적 지주
6.21, 윤슬미술관서 작품 세계 40년 아우르는 대규모 전시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김재성 사진기자] “나는 어떤 일도 냉정하게 수행할 수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내 피로 행해진 것이다. 내 작품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I’ve never been able to carry out any work coolly. On the contrary it is done, so to speak, with my blood. Anyone who looks at my works must be able to sense that.)” 김준권 판화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김준권의 판화이야기> 사이트 대문 첫머리에 걸린 독일의 회화가 이자 조각가,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의 말이다.

▲인터뷰 중 생각에 잠긴 김준권 판화가 ⓒ김재성 사진 기자
▲인터뷰 중 생각에 잠긴 김준권 판화가 ⓒ김재성 사진 기자

5월 초 이뤄진 인터뷰에서 김 판화가는 존경하는 예술가로 케테 콜비츠와 도산자 김정호를 꼽았다. 케테 콜비츠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아들을 잃고, 그러한 삶의 과정 속 흔적을 예술적 태도로 표현해냈다. 김정호는 편리한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자신의 육체로 국토 전반을 느끼고 기록한 인물이다. 김 판화가는 이들의 삶의 태도와 자신의 방향이 비슷할지는 모르겠지만, 케테 콜비츠와 김정호와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김준권 판화가는 ‘화각인(畵刻印’이라는 호를 사용하고 있다. 자신의 호를 ‘그리고 새기고 찍는’ 것으로 정한 만큼 그에게 있어, ‘판화’는 단순히 자신이 행하고 있는 작업을 넘어서 있는 듯 했다. 유화 작업으로 작품을 시작했지만, 80년대 시대상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붓을 놓고 칼을 드는 길을 택했다. MMCA(국립현대미술관) 작가와의 대화에서 “작품 자체가 메시지이길 바랐다”라는 그의 말을 되돌려 보면, 어쩔 수 없이 판화가 그를 끌어당긴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 판화가는 1980년대 민중 미술 이후, 리얼리즘 풍경을 거쳐 현대적 관조의 산수까지 작품 세계를 변화시켜왔다. 그는 근 30여 년간, 우리네 국토를 소재로 한 작업을 선뵀고 최근엔 <산의 노래>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 5월 8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김준권-山의 노래》 개인전을 열었다. 오는 6월엔 김해 윤슬 미술관에서 40년 회고전도 준비하고 있다.

5월 초 두 시간 여 진행됐던 인터뷰에서 ‘한국 목판화’의 역사와 우리 국토가 가진 정서와 얼, 이를 되살리기 위해 현재의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그는 자신이 너무 철학적이고 어려운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을 여러 번 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다 보니 그렇다면서도, 그간 어디서도 잘 말하지 못 했던 것들을 말 할 수 있게 돼 후련하다는 감정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판화의 장르와 기법, 역사를 모두 아울렀던 그와의 대화는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준권’이라는 판화가이기에 할 수 있는 값진 이야기가 오고 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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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권-山의 노래》에 전시된 목판화의 원판 ⓒ서울문화투데이

2020년부터 불어 닥친 팬데믹 시기에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했다. 이번 전시 《김준권-山의 노래》에선 팬데믹시기에 한 작업들도 선보인다. 작가로서 코로나19 시기를 어떻게 보냈는가. 작품에도 영향을 끼쳤는지.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들이 비슷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먼저, 기본적으로 전시를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 됐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작업하는 시간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 다음으로는 이 팬데믹 상황을 통해 우리의 현재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얻지 않았나 싶다.

작가에게는 시대적 소명이라는 게 있다고 본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소위 우리가 지향하는 발전 모델이나 미래 사회가 과연 맞는 것이었는지 고민하게 됐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 팬데믹은 ‘현대 문명’이라고 볼 수 있는 인간의 절대적 소유가 바탕으로 완성된 어떤 체계가 지속가능한 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고 본다.

바이러스에 대한 전문지식은 없지만, 이 코로나19가 어느 날 그냥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가까이 있지 않았던 어떤 것과 인간이 만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소위 자연계 내에서 자기들끼리 질서를 가지고 잘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종의 공간이 인간에 의해 계속 줄어들다가, 결국 한계에 몰려 인간과 그 종의 바이러스가 만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시기 속에서 자연을 보는 관점을 다시금 고찰하게 됐다. 코로나 시기 이전에도 대상으로만 자연을 본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좀 더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보는 관점에서 점점 멀어진 듯 하다. 인간 삶의 근거로서의 자연, 삶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에 대해 사유를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김준권,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3 ⓒ서울문화투데이
▲김준권,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3 ⓒ서울문화투데이

김준권 판화가에게 백두대간은 주요한 소재다. 백두대간은 어떤 존재인가.

일종의 정신적인 모태 같다. 백두대간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다. 발해 수도인 상경용천부를 기준으로 삼아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만든 <대동여지도>를 보고, 사람들을 어떤 동물의 형상으로 얘기하거나 다양하게 표현 하곤 한다. 그런 정서와 시각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분단된 국가에 살아가고 있으면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은 반도(半島) 형태인 우리 국토를 제대로 겪어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 분단 세대는 한반도를 마치 섬처럼 살아가고 있다. 우리 앞 세대만 해도 항상 대륙과 교류하면서 살았다. 우리나라의 신화를 찾아보면, 요하 문명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시원(始原)과 설화가 다 백두산과 대륙에 응집돼 있다.

우리가 문명적,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네 민족의 근원은 북방과 대륙에 있다. 분단되면서 이 대륙의 문화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백두대간을 통해, 사실 우리의 근원은 대륙에 있다는 점을 계속 얘기하고 싶었다.

또 하나 짚어보면, 우리나라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산이 참 많다. 거기에다 사계절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겹겹이 겹쳐진 산을 보면, 볼 때마다 다른 모습이 보이고, 정말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런 레이어들이 작가에게 조형적 욕심을 갖게 한다. 형식적인 의미로 봤을 때 산맥의 선(線) 자체에 주목해볼 수 있고, 의미론 적으로 해석한다면 산맥 사이, 고개 너머마다 있는 마을과 우리 민족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 백두대간은 바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그대로 갖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라고도 느껴진다.

예전에 “판화는 사실 판화가 아니라 인화다”라는 얘기를 하면서, 새기는 것보다 찍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더군다나 지금 목판화는 교과서에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아서, 그 원리나 역사를 쉽게 인지하기 어렵다. 구체적인 판화 이야기를 듣고 싶다.

목판은 판화의 출발이다. 그런데, 목판을 하다 보니 ‘나무’라는 재료에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생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세밀한 작업을 하기에는 목판화가 너무 투박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 번 동판에 긁어서 표현을 해보자해서, 목판에서 동판화가 파생됐다. 그 다음에 평판이라는 것이 있다. 현재 나는 평판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판면에서 물을 조절해서 베이스를 깔고 찍는 방식이다. 새김판이 아니고 판면에서 물의 농도를 가지고 평인의 방식으로 찍는 것이다. 이것이 요즘 판화 기법에서 나오는 평판의 출발이고, 이것이 실크 스크린이 되고 석판화로 나아간 것이다.

▲‘춤추는 산’ 작품과 김준권 판화가의 그림자 ⓒ김재성 사진기자

40여 년간 목판화의 작업을 꾸준하게 이어왔다. 목판화만이 가진 정서나 힘이 있다면.

목판화를 가지고도 세밀한 것과 평판의 부분을 표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연구를 해왔다. 목판을 지속하는 이유는 종이하고도 관련된 지점이 있다. 평판의 방식인 석판화로도 내가 하고 있는 작품의 경향, 여백 같은 것을 표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맛 같은 것은 표현되지 않는다. 목판과 화선지가 어우러져, 안료가 배어들어가서 표현되는 느낌은 석판화와는 전혀 다르다.

석판화는 ‘온(On)더 컬러’의 방식이라면, 내가 하고 있는 목판화는 ‘베이스드(based) 컬러’라고 볼 수 있다. 색이 종이에 스며들면서 드러나는 방식인 것이다. 이 과정을 염색에 빗대서 얘기하자면, 내가 하고 있는 목판화 평판 작업은 전통 염색을 하는 것과 같다. 쪽 염색처럼 천을 한 번 담갔다가 빼고, 조금 더 진한 색을 내고 싶으면 말렸다가 다시 색을 물들이는 것이다. 그런 반면에 석판화의 기법은 날염과도 같다. 어떤 명징한 색을 내기 위해 한 번에 색을 입힌다. 아예 접근 방법이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엔 판화기계를 사용하는 작가들도 많은데, 특별히 수작업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는가.

판화기계는 서구에서 들여온 것이고, 서구에 맞는 종이와 잉크가 있다. 그러니까, 판화기계는 서구방식에 맞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확히 따지자면, 그것들은 서양 기법에 맞는 판화를 할 수 있는 기계라다. 우리네 판화는 그렇게 찍으면 안 된다. 판이 다 망가지고, 마모 돼 버린다. 화선지를 사용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팔만대장경을 찍는 것을 보면 물감 바르는 솔로 물감을 바르고, 종이를 올리고, 머리카락을 뭉쳐서 만든 뭉치인 마력(磨力)이라는 것으로 살짝살짝 눌러 찍는다. 결론적으로는 판화기계는 유성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하고 있는 것이나 한국 목판화는 기계를 사용할 수 없다. 기계로 하게 되면 힘이 너무 세다.

수작업을 하기 때문에 대작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판화기계를 사용하면 기계에 맞는 소품 형태로 할 수 밖에 없는데, 수작업이기 때문에 목판을 모두 이어 붙여서 대작이 가능한 것이다.

▲인터뷰에 답하고 있는 김준권 판화가
▲인터뷰에 답하고 있는 김준권 판화가 ⓒ김재성 사진기자

판화가 아닌 회화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판화로 전환한 계기가 궁금하다.

80년대라는 독재시대의 상황이 나를 판화의 길로 이끌었고, 머물게 했다고도 볼 수 있다. 81, 82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 때엔 유화작업을 했다.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인물화를 주로 했고, 개인전도 열었다. 인물화 작업에서 나는 주로 사회적 메시지를 지닌 인물들을 택해서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5월의 광주를 그린 작품이 전시회에 출품이 되고, 그 작품으로 내 인생에 변화의 순간이 찾아왔다. 어떻게 보면 삶에 있어서 악수(惡手)였기도 했던 것 같다.

그 시절엔 5‧18 민주항쟁을 표현하고 애도하는 것이 불온시됐다. 그 작품으로 인해, 소위 작가로서 발언에만 머물러 있던 내가 정부와 대립하고 불화를 겪게 됐다. 그 과정 속에서 물러서든지 아니면 불화 속에서 계속 싸우든지를 택해야 상황을 맞닥뜨렸다. 나는 그때, 후자를 택했다.

싸우고 견뎌내기 위해서는 함께 할 다수가 필요했다. 사람을 모으려면 메시지가 필요했고, 당시 ‘삐라’라고 불리는 그런 전단을 빠르게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 과정에 판화가 굉장히 유용한 장르였다. 어떻게 보면 그런 그룹들에 의해서, 필요에 의해서, 김준권은 붓을 놓고 칼을 들고 새기는 역할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후에 자연스럽게 판화를 그만두고 다시 회화로 돌아왔어도 됐는데 하다보니까 재미가 있었다. 프로파간다 목판화가 아닌, 우리나라 전통 목판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우리나라 목판화 역사가 1,000년이 넘는다. 그런데, 목판화에 대한 자료도 드물고, 목판화를 얘기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 순간에 ‘내가 하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이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김준권, 산의 노래 -16, H125cm×W80cm, 2022년, 채묵목판
▲김준권, 산의 노래 -16, H125cm×W80cm, 2022년, 채묵목판 (사진=김준권 제공)

직접 운영하고 있는 <김준권의 판화이야기> 사이트 대문 첫머리에 독일의 회화, 조각가이자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의 “나는 어떤 일도 냉정하게 수행할 수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내 피로 행해진 것이다. 내 작품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걸어뒀다. 작가 본인의 작업을 이 글로 표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작가로서, 정신세계를 잘 드러낸 말이었다. 철저한 리얼리스트로서 자세가 느껴졌다. 자기언어가 자신의 삶과 체험에서 발화되고 있었다. 케테 콜비츠는 1차 세계대전에서 아들을 잃고, 그 과정 속에서 작품을 이어왔다. 작품 전반에서 작가의 삶의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리얼리스트로 내가 존경하는 분이다. 자신에게 들어오는 자극으로 작업에 임하는 태도와 작업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비슷한 지향을 갖고 있다.

우리 조상 중엔 고산자 김정호 선생을 굉장히 존경한다. 7.5m 달하는 <대동여지도> 그것만 봐도 그분의 평생 발자취가 느껴진다. 요즘시절도 아니고, 150년 전에 자신의 두 다리, 두 발로 국토를 다 걸어 다니면서 기록을 남겼다. 특히 <대동여지도>를 보면 백두산이 있는 곳만 여러 개의 꽃을 사용해서 표현했다. 다른 곳은 다 지도인데 백두산만 꽃을 사용해 모든 계절을 표현하고, 그 곳이 마치 이 한반도의 꽃처럼 표현 해놨다. 사실 <대동여지도>를 보면 백두산이 ‘꽃’이고, 백두대간이 그 꽃의 ‘줄기’로 표현돼 있다. 김정호 선생이 얼마나 이 국토를 사랑했는지 드러나는 지점이고, 내가 그 정신을 이어나가고 싶단 바람이 있다.

▲《김준권-山의 노래》 전시장에서 김준권 판화가 ⓒ김재성 사진기자

앞으로 시도하고 싶은 작품이나, 작가로서의 지향점이 있다면.

수목으로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영역이 아직 남아있다. 그리고 백두대간 작업도 계속 돼야 한다. 그리고 환경적인 여건이 된다면 목판화 교육을 시도하고 싶다. 판화 자체의 미학이나 고유한 예술적 정체성이 있다. 그 점을 새롭게 바라보고, 판화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 기회가 있길 바란다.

앞으로의 전시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예정이다.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에서 6월 21일부터 전시를 연다. 지난 2014년 아라아트에서 했던 전시의 조금 작은 버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초기 작품부터 시작해서 내 작품 세계 40년을 아우르는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