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석의 컬렉션 비하인드] 여보! 나 그거 못 사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소, 김달진
[윤태석의 컬렉션 비하인드] 여보! 나 그거 못 사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소, 김달진
  • 윤태석 남평문화주조장 대표
  • 승인 2023.08.2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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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석 남평문화주조장 대표(예술감독)/문화유산국민신탁 자문위원

어떤 일에 미쳐야만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不狂不及)처럼, 특정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려면 미치광이가 되어야 한다. 김달진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김달진(金達鎭, 1955~)은 내성적이며 여성스럽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의 소유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더 그래졌다고 한다. 목소리는 가늘고 체격은 왜소하며 자동차는 있지만, 운전은 하지 못한다. 그의 아내 최명자 여사 역시 그와 똑 닮았다. 다른 게 있다면 운전을 한다는 것뿐.

격 있는 행사가 있을 때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상에 몸에도 잘 맞지 않는. 어떤 때는 봄인데도 겨울 양복을 입고 나와 왜소함과 수줍음, 순박한 성품이 더 부각 될 때도 있다. 본인이 직접 디자인해 맞춰 입기를 즐겼던 고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이 준 옷을 있는 그대로 입고 나온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쪽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까닭이다. 언젠가 필자가 “허 관장님이 왜 양복을 주셨나요?”라고 묻자 “그건 돌아가신 허 관장님께 물어보셔야죠?”라는 무덤덤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이를 요즘 뜨겁게 떠오르고 있는 온라인 트렌드에 접목하자면 김달진은 세련, 도시, 부자, 남성, 당당, 유행(시류)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미지로 중무장한, 컬렉션 계의 챗GPT(Cha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즉, 순박, 시골, 서민, 여성적, 소심, 수줍음으로 잘 조합되어, 그를 만나는 이에게 엄청난 속도로 침투하여 강력한 동정심을 유발케 하는 최적화된 딥러닝 체계인 것이다. 그래서 김달진 주변에는 기증·기부자도 많다. 이렇듯 김달진은 재력을 빼고는 컬렉터가 갖춰야 할 최적의 조건을 갖춘 수집가다. 돈이 있었다면 안목과 성실, 집념과 미술 자료 만으로의 집중력을 방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달진 관장과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사진=윤태석 제공)
▲김달진 관장과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사진=윤태석 제공)

김달진이 수집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다. 고희를 앞두고 있으니 수집 업력 55년에 6만 점 정도의 자료를 수집했다. 그중 그의 보물은 단연 《書画協會 會報》(서화협회 회보)》다. 1918년에 우리나라 서화 작가들이 창설한 서화협회가 1921년에 발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잡지다. 그 이듬해인 1922년까지 딱 두 번밖에 발간되지 않았기에 희소성 또한 대단한 희귀자료다. 그가 국립현대미술관에 재직할 때인 1984년에 개최한 ‘韓國近代美術資料展 開化期-1970’(1984.12.05.~30, 국립현대미술관 서관, 현 덕수궁관)에 소장자이던 서지학자 고 안춘근(安春根, 1926~1993) 선생으로부터 대여해와 전시하며 처음 접했던 역사적인 자료다. 그런 자료가 2010년 8월 경매에 매물로 나온다고 누군가가 알려주었다. 그 소식을 접하자 김달진의 눈은 번쩍 띄였다.

▲서화협회 회보 창간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소장
▲서화협회 회보 창간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소장 (사진=윤태석 제공)

벌써 손에 쥔 것처럼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아내와 마주 앉았다. “여보 나 긴히 할 말이 있소. 서화협회 회보 창간호가 경매에 나온다는데 나 그거 못 사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소. 우리 박물관에도 꼭 필요하고 말이오”, “그 자료라면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이미 남편을 통해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김달진미술연구소’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살림을 도맡아 오고 있던 아내였기에, 떡볶이와 아이스크림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아이처럼 승낙도 반대로 할 수 없는 어정쩡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개표 결과를 기다리는 후보들처럼 김달진의 표정은 초조해져만 갔다. “당신이 그렇게 원하시니 어쩌겠어요. 꼭 사 오세요.” 결혼과 함께한 세월만큼이나 미술 자료 전문가가 다 된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보 고마워!” 비로소 특유의 수줍은 미소가 얼굴에 가득 번지며 김달진은 살며시 아내의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경매라는 곳에 가 등록하고 패들을 받아 회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떨리던지요?” “저처럼 그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포진해 있던 쟁쟁한 컬렉터들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김달진은 언젠가 모 공중파 방송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마침내 회보가 등장하자 장내는 사우나에 꽉 찬 증기처럼 달아올랐다. 김달진에게 상한가는 없었다. 단지, 회보만 있을 뿐. 패들이 오르내리기를 수차례, 호가는 올라가고 김달진의 손에 들린 패들에는 진땀이 서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지났을까? “더 응찰하실 분 없습니까?” 마침에 김달진만 남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지 26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자료가 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김달진 관장(좌)과 필자(우)(동경국립근대미술관, 2009.12.6) (사진=윤태석 제공)
▲김달진 관장(좌)과 필자(우)(동경국립근대미술관, 2009.12.6) (사진=윤태석 제공)

김달진은 취미도 특기도 수집이다. 그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그는 반쪽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취미가 직업이 되고 직업이 천직이 되어 그 노정의 퇴적물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우리 문화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자료를 지고 나르느라 어깨와 목이 망가져 대수술을 받았고, 한때 왜소증으로 고생하던 어린 아들에게 맞힐 주삿값이 없어 삶을 책망하기도 했지만, 그는 행복하다.

기록물 보존 전문가(Archivist)와 연구소장, 박물관장, 〈서울아트가이드〉 발행인과 유튜버로 김달진은 오늘도 어김없이 미술 현장에 있다. 그 힘의 원동력은 그가 그토록 믿고 있는 절대자만 알 뿐. 그렇게 김달진은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