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 ‘피아노섬’ 된 신안 자은도...임동창 피아노, 감동과 전율의 앙상블 선사
[이채훈의 클래식비평] ‘피아노섬’ 된 신안 자은도...임동창 피아노, 감동과 전율의 앙상블 선사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담 객원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3.10.2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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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피아노의 장관과 국악 명인명창 어우러진 '음악의 힘'
2023 문화의달 축제, ‘1004섬, 예술로 날다’ 참관기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모차르트 평전> 저자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모차르트 평전> 저자

이것은 살아있는 음악이다! 임동창 선생은 자기만의 독특한 연주의 피아노로 이생강 선생을 비롯한 여러 국악 명인들과 함께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50년 넘도록 서양 클래식 음악만 듣고 살아온 내게 임동창의 라이브 연주는 신선한 충격이자 경이로운 음악적 경험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 음악을 찾았다는 ‘국뽕’이 아니다. 우리 시대,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음악이 존재하며, 세계인의 문화로 사랑받을 만한 잠재력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지난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한반도 남서쪽 끝자락 신안의 자은도에서 ‘1004섬, 예술로 날다’가 열렸다. 2023년 문화의달을 기념하여 신안군이 유치한 행사지만, 관변행사의 한계를 넘어 살아있는 우리 음악의 진수를 들려준 진정한 축제였다. 104명의 피아니스트와 70여명의 국악 명인들이 참여한 이 음악회의 프로그램을 짜고 지휘하며 연주한 사람은 작곡가 겸 풍류 피아니스트 임동창이었다. 

21일 저녁, 자은도 뮤지엄파크의 야외무대에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객석은 기대에 찬 청중들로 가득했다. 6시로 예정된 음악회는 문체부장관, 전남도지사, 신안군수 등 ‘나리’들의 인사말에 이어 6시반에 시작됐다. 박우량 신안군수가 어눌한 피아노 연주로 시작을 알리자 관객들은 큰 웃음으로 화답했다. 임동창이 연주하는 아리랑에 맞춰서 104명의 피아니스트가 등장했다. 이날 음악회의 타이틀은 《산다이, 신안에서 대한민국으로, 세계를 품다》. ‘산다이’는 여러 사람이 즉흥적으로 어우러져 춤추고 노래하는 호남 섬 지역의 축제문화를 가리킨다. 예술감독 임동창은 ‘신안 사람들의 역동적인 흥이 큰 매력’이라고 말했는데, 이날 음악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열기를 더하며 다 함께 어우러지는 대동 춤판으로 발전했다. 

첫 무대는 임동창의 문하생들인 ‘타타랑’과 압해동초등학교 어린이들이 함께 한 《신안 아리랑》과 《고래야 고마워》였다. 해맑은 어린이들의 춤과 노래는 어둠이 깃든 신안 앞바다의 찬 공기를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임동창 선생이 우리나라에 처음 피아노가 들어올 당시의 역사를 설명한 뒤 104명의 피아니스트들이 클래식, 재즈, 가요 등 지금까지 이 땅에 울려 퍼진 피아노 음악들을 메들리로 선보였다. 

임동창 풍류 피아니스트가 신안 자은도 ‘1004섬, 예술로 날다’ 축제에서 100+4대의 피아노와 피앗고 협주로 큰 감동을 선사했다.
임동창 풍류 피아니스트가 신안 자은도 ‘1004섬, 예술로 날다’ 축제에서 100+4대의 피아노와 협주로 큰 감동을 선사했다.

이 많은 피아노를 한꺼번에 연주하면 어떤 음악이 펼쳐질지 무척 궁금했다. ‘피아노 오케스트라’인 셈인데, 혹시 소음의 카오스가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104 피아니스트’(자발적으로 참여한 전국의 피아니스트들과 한예종 학생들로 구성)는 단정한 앙상블을 들려주었다. 대체로 유니슨으로 연주했기 때문에 실제 사운드는 한명의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야외무대에 몰아친 바람 때문에 악보가 제멋대로 넘어가는 불편한 상황에서도 일치된 호흡을 이뤄낸 피아니스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04’는 1004(천사)개의 섬으로 이뤄진 신안을 상징하는 숫자다. 자은도는 ‘104 피아노’를 통해 ‘피아노의 섬’으로 거듭났다. 

‘104 피아노’가 《밀양아리랑》을 연주하자 흥겨움에 분위기가 들썩거렸다. 타타랑이 ‘104 피아노’ 반주로 노래한 《쑥대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임동창 작곡)는 1부 레퍼토리 중 가장 흥미로웠다.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과 조용필 노래의 모티브를 섞어서 재창조한 곡인데, 이별의 한을 노래하는데도 유머러스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서양 클래식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탁월한 작품이었다. 

신안 자은도 ‘1004섬, 예술로 날다’ 축제에서 104대의 피아노와 임동창의 피앗고 협주가 웅장하게 울려퍼졌다.
신안 자은도 ‘1004섬, 예술로 날다’ 축제에서 104대의 피아노와 임동창의 피아노 협주가 웅장하게 울려퍼졌다.

2부는 줄타기 묘기로 막을 열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악천후에도 줄타기 명인 김대균의 제자들은 익살스런 사설과 훌륭한 묘기로 탄성을 자아냈다. 연로한 분들이나 어린이를 데려온 분들은 아무래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은 날씨, ‘나리’들을 포함, 상당수 관객들이 자리를 떴지만 장내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임동창 선생의 신들린 피앗고를 감상할 차례가 다가왔다. 그런데 이날 피앗고 연주는 전 날 강풍 탓으로 악기가 올라 올 수 없어서 피아노로 대체돼 아쉬움은 있었지만, '임동창의 피아노'는 또다른 빛을 발했다. ‘피앗고’는 피아노와 가얏고를 합성한 말로, 우리 전통악기처럼 원초적인 자연의 소리가 나는 피아노다. 임동창 선생이 피아노 장인 서상종 선생과 함께 제작한 피앗고는 전세계에서 오직 임동창만 연주하는 독특한 악기다. 첫 곡 《시나위》, 임동창의 연주는 김무길의 거문고, 최경만의 피리, 원장현의 대금, 김영길의 아쟁과 어우러져 흥겹게 흘러갔다. 시나위는 호남 지역 굿거리와 살풀이에서 유래한 기악 합주곡이다. 이날 연주는 임동창의 피아노 연주가 다른 악기에 즉흥적으로 화답하며 서양의 피아노 퀸텟과 전혀 다른 신선한 멋과 풍류를 맛보게 해 주었다.

대금의 국보급 명인 이생강 선생이 임동창 선생과 함께 《대금산조》를 연주했다. 산조는 전통 기악 독주곡으로, 느린 장단과 빠른 장단이 배합된 3~6개 악장으로 이뤄져 있다. 주로 장구가 반주하지만 이날은 임동창의 피아노가 활약했다. 서양의 플루트가 흉내낼 수 없는 대금의 섬세한 음률에 피앗고가 추임새를 넣으며 어우러지는 순간들은 감동과 전율이었다. 이생강 선생은 피리를 잡고 베토벤 《운명》 교향곡 모티브와 《아 목동아》 주제가 섞인 재미있는 곡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동서양을 넘나들며 신선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한 세기 가까이 대금을 갈고 닦아온 이생강 선생의 깊은 내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피아노 연주로 대금산조에 생명력을 더해 준 임동창 선생의 천재성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신안 자은도 ‘1004섬, 예술로 날다’ 축제에서  타타랑 국악연주단이 노래와 춤으로 흥겨운 무대를 펼쳐 관객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신안 자은도 ‘1004섬, 예술로 날다’ 축제에서 국악 명인명창들과 임동창의 피아노 연주가 어우러져 신명을 더했다.

이어진 판소리 한마당에서 임동창은 북 대신 피아노로 고수 노릇을 했다. 여러 판소리에서 발췌해 스토리를 만든 여성 명창들의 무대에 이어 남성 명창들이 등장했다. 왕기석 명창은 《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장면, 왕기철 명창은 《흥부가》 중 흥부 박타는 장면을 들려주었다. 수많은 판소리 마당 중에서 해방과 해원의 순간을 묘사한 대목들이었다. 이영태 명창은 김대중 전대통령 성대모사로 관객들의 폭소를 유발했다. 

이어진 《칠채 휘모리》에서 음악회는 절정에 도달했다. ‘칠채’는 경기 남부의 농악에서 유래한 가락으로, 2박과 3박이 섞인 변박자로 돼 있다. 이 ‘칠채’를 가장 빠른 ‘휘모리’로 연주하는 게 《칠채 휘모리》다. 임동창은 아쟁 김영길, 칠현금 류경화, 가야금 최진, 대금 이용구, 타악 김동원·김주홍 등 명인들과 함께 관객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아쟁, 칠현금, 가야금이 차례로 질주한 뒤 '임동창 피아노'의 신들린 솔로가 펼쳐지는 대목은 특히 놀라웠다. 임동창 선생은 손바닥으로 건반을 두드리고 맨발로 피아노 건반 위를 걸어다니는 신공을 펼쳐 보였는데, 이는 작위적인 퍼포먼스가 아니라 흥이 넘쳐서 저절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였다. 서양 클래식에서 모차르트의 《주피터》 교향곡,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말러의 《천인》 교향곡의 마지막 대목이 모든 악기의 질주를 통해 주체할 수 없는 환희에 도달하듯, 이날 음악회는 《칠채 휘모리》에서 대단원을 이루었다. 

신안 자은도 ‘1004섬, 예술로 날다’ 축제에서  타타랑 국악연주단이 노래와 춤으로 흥겨운 무대를 펼쳐 관객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신안 자은도 ‘1004섬, 예술로 날다’ 축제에서 타타랑 국악연주단이 노래와 춤으로 흥겨운 무대를 펼쳐 관객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모든 출연자들이 다시 등장, 관객들과 함께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부르며 음악회를 마무리했다.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나라, 서로 도우며 평화를 전하는 나라, 하늘 아래 가장 자비로운 나라,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며 자연 사랑하는 나라, 하늘 아래 가장 한가로운 나라, 잃었던 우리 기운 되찾아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 이루세.” 대동의 세상, 분열과 증오와 대립의 수렁에 빠져 있는 듯한 이 나라에서 다시 희망을 갖게 해 주는 음악의 힘을 확인했다. 임동창 선생을 포함한 출연자들은 무대에서 내려와 관객들과 《아리랑》을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름다운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20일 저녁 열려야 했던 첫 공연 《아름다운 피아노섬, 자은도》가 폭풍 때문에 취소된 건 아쉬웠다. 그날 임동창 선생과 타타랑은 예정된 공연 대신 숙소에서 즉흥 공연을 마련했는데, 이 해맑고 사심없는 예술가들과 가까이 호흡하며 어울릴 수 있는 감사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