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Interview] 이진자 내포문화조각가협회장 (조각가) “삶의 찬가를 빛과 소리로 풀어내”
[Culture Interview] 이진자 내포문화조각가협회장 (조각가) “삶의 찬가를 빛과 소리로 풀어내”
  •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이동규 사진가(사진작가협회 예산군지부장)
  • 승인 2023.11.1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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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토박이, 교직ㆍ공직ㆍ문화예술계 아우른 살림꾼
윤봉길 의사와 독립선언문 정신 기려, 33명 회원 모집한 ‘내포문화조각가협회’
미국 텍사스주 킬린시, 6.25 참전 용사 기리는 조각상 제작
2016년 프랑스 전시, 세계적 비평가 제라르 수리게라 초청, 작품세계 확장
2012년 일랑 이종상 화백 기념관 설립 추진, 현재 충남도립미술관 준비에 협조
“내 조형 언어로, 행복한 삶의 언어ㆍ치유 표현할 것”
작가ㆍ주민ㆍ기관장, 세 개의 원으로 어우러진 전시 오프닝 행사 인상적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이동규 사진가(사진작가협회 예산군지부장)] 무궁화호 기차와 새마을호 기차만이 정차하는 충남 예산역에서 10분정도 걸어가면, 예산 지역민과 예산 문화예술인들의 문화예술 공간 ‘이음 창작소’를 만날 수 있다. 일제시대에 조선에서 수탈한 곡식을 저장하던 공간이었지만,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지역민들의 활기찬 문화적 보금자리가 돼주고 있다.

▲이진자 회장이 자신의 작품
▲이진자 내포문화조각가협회장이 자신의 작품 <북소리는 들리는데>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이동규 사진가

‘이음 창작소’에서는 오는 16일까지 내포문화조각가협회의 정기전시회 《충청의 어울림전-色, 調和》이 열리고 있다. 충남 시각예술인들이 한 자리에 어우러져, 각기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색을 발휘하는 자리다. 미곡창고로 사용됐던 공간인 만큼 전시장은 층고가 높고, 넓은 공간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 곳에 전시된 총 28명 작가들의 작품은 각각의 작품성을 발휘하며 놓여있다. 특히 한 가지 장르가 아닌, 현대 입체 조형 예술과 회화, 미디어아트, 설치 작품을 모두 만나볼 수 있는 자리이기에 예산 지역민들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지난 6일 겨울이 시작될 무렵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이번 《충청의 어울림전-色, 調和》 전시를 준비해 선보인 내포문화조각가협회 이진자 회장을 만나러 예산으로 향했다. 이 회장은 예산에서 태어나, 예산에서 학창시절과 직장생활까지 한 예산 토박이 인물이다. 이 회장과 서울문화투데이의 인연은 2012년 일랑 이종상 화백 기념관 설립 준비 때부터 이어져왔다. 이종상 화백 기념관 건립은 자치단체장이 바뀌면서 아직도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 회장의 꾸준한 작품 활동과 지역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해서 서울문화투데이를 통해 전해졌다.

예산은 어떤 도시일까. 예산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향이자, 대한민국 오만원 권, 오천원권의 신사임당과 율곡의 영정을 그린 이종상 화백의 고향이다. 또한, 고암 이응로, 설봉 김두환 화백 등 손에 꼽힐만한 예인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고향으로 우국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현재 예산은 인구 7만 8천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이지만, 예산군 삽교읍과 홍성군 홍북면 일대가 내포신도시로 결정되면서, 젊은층의 인구도 유입되고 있는 잔잔하게 끓어오르고 있는 지역이다.

예산에서 나고 자란 이 회장은, 1981년부터 1991년까지 대흥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지역의 문화예술 씨앗을 발굴하고 키워냈다. 교직에서 물러나서는 모교인 목원대학교에 출강하며, 또 한 번 조각계의 후배들을 길러냈다. 지역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조각’이라는 외길을 걸어온 이 회장에게 지역의 일꾼이 되라는 제안은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 같다. 이 회장은 교직에서 물러나서, 예산문화원장으로 일하고 이후에는 예산 군의원으로 의정활동에도 나섰다. 조각가이기도 했고, 선생님이기도 했으며, 군의원이기도 했던 이 회장의 길에서 변치 않았던 신념은 문화예술을 향한 열정과 예산을 향한 애향심이었다.

전시가 열리고 있는 이음 창작소에서 이어진 인터뷰에서 이 회장의 지금까지의 행보와 그의 작품관을 이야기 했다. 회장은 인터뷰 초반에 ‘예산’ 지역에 대한 애정을 표하면서, 현재의 ‘예산’은 아직 잠을 자고 있다는 말을 했다.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한 예향의 도시가 제대로 움트고 있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그 빛이 움틀 때까지 열심히 정진하겠다는 이 회장의 바람이 담겨 있는 듯 했다. 이 회장은 현재 예산에 지역주민과 방문객들의 문화예술 커뮤니티 공간으로 ‘더 뮤지엄 아트진’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작업실과 함께 갤러리 카페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 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자신이 구의원 당시 뉴질랜드와 협약을 맺어 예산의 몇몇 농가에서만 제작하고 있는 신품종인 ‘NB 사과’를 기자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번 내포조각가 개막식에 함께한 축하객들에게도 사비를 들여 선물했다고 한다.

▲《충청의 어울림전-色, 調和》 개막식, 지역민과 작가, 기관장이 원을 만들어 색색의 한지를 찢는 커팅식을 했다 (사진=내포문화조각가협회 제공)

인터뷰를 마치고 전시장을 나오는 길 전시를 관람하고 돌아가는 초등학생과 어머니를 만났다. 아이가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며, 작품을 보여주고자 방문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무엇이든 많이 보고, 느낄수록 도움이 될 것이라고 독려했다. 10여 년간 교직에 있었던 이 회장의 모습과 지역에 문화예술의 정취를 뿌리내리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지역 살림과 작업과 충남문화예술인들의 엄마 같은 존재로 자리하고 있는 그의 시간을 만나봤다.

고향이 예산이기도 해서 일 것도 같은데, 예산과 충남의 문화예술 확산을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을 해 온 것 같다. 그간 활동상을 간략히 들려 달라.

예산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학업을 모두 마쳤다. 교직 생활을 했는데, 이 또한 예산에서 했다. 미술 선생님을 했고, 선생님을 하면서 전국 학생대회에서 학생들의 우수한 성적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예산은 추사 김정희 선생으로부터 시작해, 설봉 김두환 화백, 일랑 이종상 화백의 고향으로 예향의 도시다. 예산의 토박이로서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재의 예산은 잠을 자고 있다고 많이들 표현한다. 이 잠자고 있는 예향 예산을 깨우고자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사되진 못했지만 2012년 일랑 이종상 화백의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했다. 2012년 당시 인구수 8만 9000여 명 남짓한 곳에서 1만여 명이 자발적으로 서명에 동참해 이종상 기념관 건립에 힘을 쏟았다. 당시 초청 강연회도 열고, 전국 미술협회 임원을 초대해서 군단위에서는 처음으로 문화예술가의 활동상을 알리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종상 화백의 기념관 건립을 성사시키진 못해 애환을 안게 됐지만, 현재는 충남도립미술관 건립에 노력을 또 기울이고 있다.

도립미술관 건립에 앞서 충남 작가들의 발굴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여러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1950년,60년 이후 출생한 충남미술가들의 개인사를 정립하면서 충남 미술가들의 맥을 찾아가고 있다. 오는 12월 3일에는 충남미술사를 심도 있게 다룰 콜로키움도 충남도 주최로 열릴 예정이다.

현재 충남도립미술관 건립 과정 중에 일랑 이종상 선생님과 설봉 김두환 화백에 대한 내용의 제안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종상 화백은 예산의 정말 중요한 인물이다.

작가 활동을 하며, 한국미술협회 예산 지부장으로 예술 단체의 일을 시작했다. 당시 지부장을 하면서 예산으로 전국의 작가와 지부장들을 초청하는 회의도 성사 시켰다. 예산의 행정단체와 예술단체, 120명의 회원들이 교감하고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예산문화원장에 당선돼 일했다. 당시에 ‘전국 추사 김정희 휘호 대회’의 시상 제도를 격상시켰다. ‘문화부 장관상’을 ‘국무총리상’으로 승급시켰다. 또한, 예산의 문화예산의 많은 부분을 개선시켰다. 예산 추사 문화제 예산이 원래 2천 만 원이었는데 2억 원으로 상향시켰고, 예산 문화예총 육성 지원 조례를 발의해서 예산이 문화예술 도시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전시장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이진자 내포문화조각가협회장 ⓒ이동규 사진가
▲전시장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이진자 내포문화조각가협회장 ⓒ이동규 사진가

2016년 내포문화조각가협회가 창립됐다.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데, ‘내포문화조각협회’ 소개를 부탁한다.

사단법인 내포문화조각가협회는 총 33명의 회원으로 구성돼 있다. 회원 수 33명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내포의 큰 인물인 윤봉길 의사를 기리고 있는데, 독립선언문에 참여한 운동가가 33명이라는 것에 기인해 회원 수를 33명으로 정했다. 내포문화조각가협회의 창립기념회도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했다.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충청지역의 조각 문화를 발전시키고 작가들의 작품 발표를 도모하며, 작가들이 삶 속에서 예술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길 바라는 뜻에서 창립됐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조각 예술인들의 처우개선, 지원에도 목적이 있었다. 조각 예술인들은 삶이 참 어렵다. 목돈을 투자해야 작품을 완성할 수 있고, 작품을 완성한다 해도 판매까지 성사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조각 예술인들의 권익증진, 보호에도 나서는 등 협회 차원의 활동을 만들어보고자 했다.

지역 문화예술 환경 조성을 위한 활동도 하고, 문화 사업도 추진해봤다.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창구를 꾸준히 만들어, 작가들의 역량 강화에도 힘쓰고 있다. 그리고 내포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협회인 만큼 ‘애향심 고취’ 목적도 가지고 있다. 내포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이를 꾸준히 이어나가고자 한다.

내포문화조각가협회는 지역의 대중과 어우러지며, 예술 향유에도 힘쓰는 듯 하다.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

대중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행사로, 전시 활동을 해마다 꼭 한 두 번씩 추진하고 있다. 협회의 정기전시회가 올해로 8번째다. 2016년도에 첫 전시를 했다. 내포지역에 ‘덕산 온천’이 있다. 이 곳에서 대한민국 온천 축제를 개최하는데, 그때 우리 협회가 ‘치유’를 주제로 조각전을 선보였다. 축제를 찾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내포문화조각협회’에 대해서 알게 됐고, 지역의 수준 높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면서 좋은 감상을 많이 남겼다. 덕분에 당시 충남 방송국에서 전시 취재도 나오고, 작가들이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다.

올해 개최하는 정기전 《충청의 어울림전-色, 調和》는 전시 장소를 확장한 점에서 또 의미를 갖게 됐다. 지금 전시가 열리고 있는 ‘이음창작소’ 이외에 충남 도청, 천안 시청, 부여 군청, 예산 군청에서도 전시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이진자, 한국의 무희, 48*42*95cm, FRP+혼합재료, 2022 (사진=작가 제공)

오는 16일까지 열리는 《충청의 어울림전-色, 調和》은 ‘융합형 특별전시’다. 조형 예술뿐 만 아니라, 회화, 미디어아트 등을 선보인다. 전시 기획의도가 있다면.

원래는 조각 작품만 다루는 전시를 이어왔다. 그런데 좀 더 다양한 예술인들을 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산 지원을 받아서 전시를 개최하고 있는데,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정말 적은 예산이지만, 좀 더 많은 예술인들이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야겠다고 느꼈다. 작가에게 있어서 전시를 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보람이다. 예산 지역의 지원을 받아서 하는 만큼, 지역의 더 많은 예술인에게 그 영향력이 닿아야 한다고 봤다.

‘색, 조화’라는 전시 제목은, 제목 그대로 색의 다양함과 그 어우러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이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색이 760만 가지라고 한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지 못해도, 세상은 정말 다채로운 색으로 이뤄져있고,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생하고 있다. 그런 다양한 아름다움을 품고자 했다. 전시는 내포문화조각가협회 회원들 중심으로 기획됐고, 회원 추천을 통해서 혹은 충남 지역의 대표 작가들을 추천받아서 한 작가 당 2점의 작품씩, 총 57점의 전시작을 꾸렸다.

이번 전시 오프닝도 특별한 자리가 연출됐었다. 개막 커팅식을 한지를 찢어서 공중에 흩뿌리는 방식으로 했는데, 정말 아름다운 장관이 연출됐다. 개막식에는 지역주민들, 참여 작가, 기관장들이 참석했다. 커팅식을 할 때 가장 중앙에 지역 주민들이 자리하게 하고, 타원의 형태로 주민들을 작가들이 감싸고, 작가들을 기관장이 감싸는 모양을 만들어서 개막식을 진행했다. 주민들은 녹색의 한지를, 작가들은 남색, 기관장은 빨간색의 한지를 찢어서 개막을 알리는 행사를 선보였는데 정말 아름답고, 서로가 서로를 감싸 안고 어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충청의 어울림전-色, 調和》은 충남지역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지역 작가들이 함께하는 자리인 만큼 드러나는 시너지가 있을 것 같다.

지역 작가들 간의 만남의 장이 형성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천안, 예산, 당진, 세종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이번 전시에 작품을 선보였다. 층남 지역을 중심으로 작가들이 활동해오곤 있었지만, 대대적으로 만남을 가질 일은 없었다. 그런데 작가들 서로서로의 초대로 모이게 되면서, 서로 연결망을 만들어 인사를 나누고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었다. 작가들도 지역에 친화력을 갖고 기반을 다지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이진자, 한국의 무희Ⅱ, 48*42*95cm, FRP에 채색, 2022 (사진=작가 제공)

현재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력이 굉장히 독특하다. 10년 간 교사를 했고, 이후 2006년에는 예산군의회 의원활동도 했다. 그 사이 작품 활동도 꾸준히 이어왔는데, 어떤 시간이었는지 궁금하다.

1981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구상조각가 협회에 가입했고, 조각가의 길로 입문을 하게 됐다. 이후에 미술교사로 교직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하다보니, 작가로서의 삶을 살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항상 기를 쓰고 어떻게든 작가 활동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92년, 96년, 97년에 서울에서 전시회도 꾸준히 열었고, 한국구상조각가 협회와 연계돼 있는 ‘춘천MBC 초대 조각전’ 행사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교직 생활을 마무리 할 쯤엔 고향 어르신들이 나를 이끌어서, 정치에도 입문하게 됐다. 나는 이제 작품 활동을 해야 한다고 자리를 고사하곤 했는데, 어르신들이 ‘젊은 사람이 행정 일을 도와야 한다’라면서 여기저기에 이끌고 다녀서, 예산문화원장 및 의정 일도 하게 됐다.

예술인이 정계에 입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술인들의 표현을 정치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활동하는 내내 많은 속앓이도 했고 답답함도 느꼈다. 군의원이 가장 잘 해내야 하는 일은 조례를 제정하는 것이다. 현장에 정말 많이 다가섰고, 현장에서 안건을 뽑아내고, 논리적으로 준비해서 의정활동을 펼쳤다. 예술인의 언어를 논리 정연한 언어로 펼치기 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 그래서 ‘준비하는 군의원’이라는 칭찬도 받았지만, 동료 정치인들에게는 모난 돌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또 하나 특별한 활동이 있었다. 2003년 텍사스주 킬린시에서 시민회관 앞에 세울 한국전 참전 용사비를 국제공모로 선정하는 일이 있었다. 한국전에 총 15개국의 군인들이 참전했는데, 그 국가들을 대상으로 공모를 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 당국에서, 그래도 ‘한국 전쟁’의 용사를 추모하는 기념비이니, 한국 작가가 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내가 선정이 됐다. 한국의 여성 조각가로서 이렇게 큰일을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엄청난 경험이었다. 작품은 가로 6m, 세로 1m, 높이 3.4m에 무게가 9.8톤에 달한다. 중심부에 독수리를 새기고, 지휘부가 작전을 펼치는 모습을 형상화해 펄럭이는 한국과 미국의 국기를 표현했다.

현재 구글지도에서도 이 작품이 검색된다. 아직도 작품을 완성하고, 한글과 영어로 작품 설명을 써내려갔던 때가 자주 생각난다. 내게 정말 기념비 적인 일이었다.

▲이진자, 공존의 이유, Acrylic and mixed media on canvas, 65.1X90.9cm, 2023 (사진=작가 제공)
▲이진자, 공존의 이유, Acrylic and mixed media on canvas, 65.1X90.9cm, 2023 (사진=작가 제공)

이진자의 작품 세계에서 ‘무형’의 물질인 소리를 ‘유형’의 물질로 바꾼다는 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어떻게 이런 시도를 하게 됐는가.

소통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시기가 2009년 의정활동을 할 때였다. 무형의 물질인 빛과 소리를 유형의 물질로 변환시키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예술인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말과 소리는 무형의 것으로 금세 사라지곤 한다. 이 없어지고 말 것들을 어떻게 형(形)으로 남길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입, 이빨, 북, 나팔 등 소리를 낼 수 있는 소재를 형상화하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조각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인체를 모티프로 작품을 해왔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여체의 완만한 곡선과 양감을 드러내는 작품을 했다. 이런 작품을 계속 하다 보니 어느 순간 한계에 닥쳤다. 2009년부터는 여성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것이 무엇이 있을까 탐구했고,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만지는 생활 용품들, 표주박이나 채 같은 것을 작품에 녹여봤고 형태를 분해하고 다시 재조합하면서 새로운 물성에 대해서 익혀나갔다.

이런 과정이 의정활동을 하면서의 고민과 맞닿았고, 무형의 ‘소리’를 유형의 것으로 표현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경청으로 소통하는 세상>이라는 작품은 33명의 귀를 내가 하나하나 다 촬영해 직접 만들고, 원통형에 붙이고, 나팔을 표현하면서 세상에 소리를 퍼지게 하는 의미를 담아낸 것이다. 당시에 굉장히 소리치고 싶은 갈망들이 억눌려있었고, 그것들이 소리에 대한 탐구로 이어져 그런 형상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한 번 내 이런 작업관의 기점이 되는 일이 있었다. 2016년에 프랑스 파리에 있는 89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가진 적이 있었다. 프랑스 출신 비평가 제라르 수리게라의 초청으로 연 전시로, 당시 그는 내 작품에 대해 “이진자는 현대 미술의 추상적 관념 호소에 굴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관계를 세계에 말하기 위한 서술의 길을 취하지 않았다”라며 나만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표현법에 힘을 실어줬다. 그의 비평은 소리를 어떻게든 ‘유형화’하려고 한 나의 작업세계에 큰 응원이 돼줬다. 슈리게라는 “이진자의 작품은 삶을 모든 면에서 찬미하는 자유를 향한 찬가이다”라고도 말했다. 굉장히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고, 그 비평을 통해서 내 삶을 위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찬가를 불러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됐다.

지난해부터는 ‘소리’에서 나아가 ‘음악’에 집중해 조형성을 탐구해오고 있다. 음악과 무용수들의 동작들이 작품의 소재로 활용됐는데, 어떤 전환이 있었는지.

전환이 될 만한 일이 있었다. 2022년 초반부터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다. 파킨슨 병이었다. 삶이 완전 암흑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내 작업실 ‘더 뮤지엄 아트 진’이 없었다면 나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병원을 오가면서 남편의 치료를 도왔고, 현재는 남편이 주간보호센터에 입원을 하게 됐다. 남편은 교장선생님이었는데, 많은 나이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병으로 치달은 것 같았다. 4년이라는, 매순간이 고비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후에 작업실로 돌아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작업을 시작하게 됐는데, 단 한가지의 바람이 있었다. “빛, 내게 빛이 왔으면 좋겠다. 모든 빛이 나에게 있으면 좋겠다”라는 일념으로 작품을 시작했다. 아마 작품을 하는 과정이 나에게 해소의 시간이었었던 것 같다.

내 무희 작품 위로 비즈를 붙이고 또 붙이면서 빛을 만나고 면처리를 했다, 발레 무용수들의 회전 동작과 그를 비추는 섬세한 조명과 빛은 내게 많은 발상의 시작점이 됐다. <라벨의 볼레로>라는 음악에 맞춰 무용을 하는 무용수들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그들의 땀이 빛에 반사되는 순간이 정말 매혹적이었다. 그렇게 계속 작업을 했다. 손목이 망가지는 줄 모르고 계속해서 작업을 해서 ‘음악’에 더욱 집중한 무용수 조각들을 만들 수 있었다. 근육의 흐름에 따라 비즈의 표현을 달리하기도 했고, 현재도 하고 싶은 작품이 많다. 손목이 다시 나으면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

▲이진자 내포문화조각가협회장 ⓒ이동규 사진가
▲이진자 내포문화조각가협회장 ⓒ이동규 사진가

두 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내포문화조각가협회장, 조각가. 두 가지 역할에서 각각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2016년부터 창립전을 준비하고 지금까지, 회장을 맡아오면서 언젠가는 다른 사람이 이 자리를 맡아주길 바랐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회장을 맡아달라고 제안도 했다. 한 사람을 콕 짚어서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못하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 닿는 데까지는 이 일을 계속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협회에서 함께 같이 일하다보면, 회원들이 “회장님은 항상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라고 말하곤 한다. 나를 바라보면서, 믿고 따르겠다고 하는데 마음이 무겁다. 이번 전시에 있어서도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미디어 전시실의 암막 커튼도 함께 설치했고, 전시장 구석구석을 회원들과 함께 만들었다. 내가 우리 회원들의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충남의 작가들이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면, 그 끝까지 함께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다.

조각가로서는 멈추지 않고 작품을 하고 싶다. 작품을 하고 평을 받고, 애호가들에게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을 비축하고, 작품에 계속 열정을 쏟을 것이다. 여전히 하고 싶은 작품, 열고 싶은 전시들이 참 많다. 내포와 충남을 기반으로 나아가 서울에서도 전시를 열고자 한다. 서울미술협회 관계자분과 최근 소통할 일이 있었다. 내년에 예술의전당에서 아트페스타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언제든지 부르면 달려갈 준비가 돼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제 개인전을 하게 되면 10회째의 개인전이다. 지금 준비하는 작품들이 있고 이를 선보일 자리를 만들어 볼 것이다.

어떤 작가이고 싶은가.

작품에 몰두해서 내가 생각하는 나름의 유토피아 세계를 구축해보고 싶다. 내 나름의 조형 언어로 행복한 내 삶의 문화를 표현하고 싶고, 남편의 치유와 나의 치유를 조각으로 형상화해 풀어내보고 싶다. 조각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가치, 이진자라는 사람의 가치를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말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