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SELF PORTRAIT WITH PUBLIC CORNER’
[이근수의 무용평론]‘SELF PORTRAIT WITH PUBLIC CORNER’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3.12.14 1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미나유의 예술세계를 완성해놓은 10점 작품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명불허전(名不虛傳), 미나유란 이름이 결코 허명(虛名)이 아님을 확인시켜준 공연이다, ‘외부에 노출된 예술가의 자화상’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까. 2013년 ‘SYSTEM ON PUBLIC EYE' 창단공연인 ’PROJECT FIVE’를 필두로 ‘현재 우리는 어디까지 왔을까?’(2015), 'NEW WORLD ORDER'(2016), '구토'(2019), ‘BODY ROCK'(2020), 그리고 올 3월의 ’THE ROAD'까지 지난 10년간 미나유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주제는 ‘사회 속에서의 예술가’였다. 2023년 서울문화재단 예술 창작활동 지원작으로 선정된 ‘SELF PORTRAIT WITH PUBLIC CORNER’(12, 5~6,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는 그녀의 올해 두 번째 작품이면서 지난 작품들을 집대성해 불꽃같이 무대를 태운 보기 드문 수작이었다.

작품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예술가가 경험한 세상의 시선과 그 시선 속에서 꿋꿋이 지켜온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낸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예술가의 비전이라 할까. 미나유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한다. 남과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남과는 구별되는 자기다움을 지켜야 한다고. 논어를 빌린다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미나유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질문이 있다.”절망적인 한계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것인가?“(구토), ”복잡한 사회 속에서 개인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BODY ROCK), 그리고 ”예술 행위의 바탕에 존재하는 관객들과 예술적 영감을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PROJECT FIVE)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미나유는 ”예술은 끝까지 남아 자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자기희생을 통한 배려로서 완성된다.“(구토),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이며 사랑의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BODY ROCK), 그리고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이 아니면 그러면 언제? 나 자신을 즐겨야지. 당연히”(PROJECT FIVE)와 같이 대답한다. 일관성 있는 질문에 대해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미나유 작품창작의 추동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숙제를 풀어낸 예술가가 전해주는 담담한 감동

어두운 가운데 중저음의 청아한 음색이 관객들을 명상의 세계로 이끈다. 얼마 전 타계한 틱낫한 스님의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음원이다. 어스름한 조명을 받으며 한 남자(김성훈)가 무대 한쪽에 앉아있다. 로댕의 조각품을 보는 것 같다. 그 앞에 희미하게 드러나 있는 길을 응시하던 그가 서서히 일어나 춤추기 시작한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부른 ‘Sound of Silence’가 감성을 깨운다. ‘졸업’의 테마음악은 곧 이 작품의 테마이기도 하다. 

   “안녕, 어둠이여/내 오랜 친구/다시 찾아왔네! 너를 만나러/나 잠든 사이 살며시 찾아와/
    머릿속에 뿌리고 간 작은 씨앗/ 그 꿈이 아직도 살아/침묵의 소리처럼 내 안에서 자라고 있네”

마이크를 손에 든 여인(정한별)이 등장하고 연이어 하얀 망토를 머리부터 뒤집어쓴 남자(임종경)도 등장한다. 흰옷에 조명으로 찍히는 키스 마크가 진행형의 사랑임을 암시한다. 스크린처럼 뒷면을 장식한 그림 앞에서 여인을 떠나보낸 남자의 독무, 그리고 두 남자의 2인무와 남녀 셋이 어우러진 3인무가 펼쳐진다. 내 몸에 상대가 반응하고 그 반응에 다시 내 몸이 재반응한다. 친구처럼 협동하다가 때로는 경쟁자가 될 상대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서로의 같음과 다름을 계산한다. 홀로 명상하듯, 혹은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듯, 때로는 치열하게 싸우는 세 명의 춤꾼들은 미나유 춤과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어느새 훌쩍 커버린 단골 캐릭터 들이다. 내가 걸어갈 길이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목표를 잃지 않고 출구를 찾는 그들의 방황은 계속된다. 마할리아 잭슨의 ‘주기도문(Lord’s Prayer)’이 들려온다. 호소하듯 퍼지는 짙은 음률이 방황의 끝을 예고한다. 그림 위에 유성처럼 빛이 흐르기 시작한다.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역방향으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빛을 따라 이동하던 관객의 시선이 그림 중심으로 수렴하며 터지듯 폭발하는 빛과 하나가 된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라크리모사(Lacrimosas)’의 서정적인 음률과 함께하는 완벽한 피날레다. 

연극을 보는듯한 미나유의 연출, 김태원의 영감서린 음악, 이도엽∙트리거컴퍼니가 합작한 감각적인 무대미술과 영상, 조명(김재억), 의상(최인숙)에 공연기획(김수나), 진행(유명이) 등 모든 공연 요소들이 60분 무대를 가득 채운 생동감 있는 춤과 조화를 이루며 작품을 완성한다. 후회도 아니고 자만도 아닌, 다만 내려놓음이라 할까, 오랜 숙제를 풀어낸 듯한 안무자의 담담함이 감동으로 객석에 전이되어온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미나유의 예술세계를 완성해놓은 10점 작품을 보면서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무용가와 시인은 통하는 것인가 보다.

“눈감으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홍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