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남산 국립극장에 투영된 시대정신
[성기숙의 문화읽기]남산 국립극장에 투영된 시대정신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4.01.1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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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이전 국립극장 50년의 건축미학적 서사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소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 일세”. 애국가의 한 구절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남산은 원래 목멱산(木覓山)이라 불렸다.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도성의 남쪽에 위치한다하여 남산이라 칭해졌다. 남산은 북악산, 낙산, 인왕산 등과 더불어 사산(四山)이라 일컬었다. 사산을 연결한 능선에는 성벽이 조성되었고, 남산 정상에는 목멱산 봉수대가 설치되어 나라의 안보를 튼실케 했다. 

근대 시기로 접어들어 남산에도 변화가 생겼다. 남산 동쪽에 장충단이 건립되었고, 공원으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제에 의해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조성되었고,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은 북쪽의 인왕산으로 옮겨졌다. 1960년대 남산은 속도감 있게 변화했다. 케이블카 설치(1962), 남산식물원 개관(1968), 백범 김구 동상(1969) 등이 세워졌다. 

결정적으로, 1973년 남산 동쪽 사면에 건립된 국립극장은 남산의 경관 변화뿐만 아니라  한국 공연예술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깊다. 1966년 1월 7일 대통령령 제2371호 연두 교서에서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 계획이 발표되면서 남산 국립극장 건축의 서막이 올랐다. 1973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비롯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 및 문화예술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남산 국립극장 개관식이 열렸다. 그 이듬해 육영수 여사는 국립극장에서 개최된 8.15 경축행사에 참석했다가 광기서린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남산 국립극장은 이렇듯 비극적 서사가 투영된 아픈 공간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다.   

남산 국립극장은 누가 설계했을까? 충북 제천 출신 건축가 이희태(1925~1981)가 설계했고, 삼환기업이 시공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이희태는 순수 국내파 토종 건축가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다수 남겼다. 고등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그는 대표적인 유학파 엘리트 건축가인 김중업을 만나면서 소위 ‘지식인 건축가’를 꿈꾸며 고단한 나날을 보낸다.  

그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 장발과 인연이 닿으면서 이희태는 건축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최초의 모더니즘 성당으로 손꼽히는 명수대성당을 비롯 혜화동성당, 아현동성당, 압구정동성당 절두산순교성지 등을 설계했다. 또 경주박물관, 공주박물관, 부산시립박물관 등 박물관 설계를 도맡아하면서 건축가로서 명성을 쌓는다.

남산 국립극장은 이희태 건축 인생 중 최고 전성기에 설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넓은 광장, 높은 층고를 자랑하는 웅장한 내부, 400여 평의 무대와 1,500석에 달하는 객석 등 실로 압도적이다. 경회루를 모티브로 한 기단, 열 지어 서 있는 기둥, 리듬감을 살린 곡선의 지붕선 등 전통 건축양식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특히 독학으로 터득한 모더니즘 건축 문법으로 전통적인 조형성을 구현한 데서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1973년 개관한 남산 국립극장은 조국근대화를 기치로 내건 제3공화국 시절 권위주의적 건축양식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우선 극장 외형에서 드러나는 상징성에서 포착된다. 장대한 스케일의 극장형식과 열주로 구성된 대칭의 파사드, 웅장한 느낌의 로비, 넓은 광장은 민족, 근대화, 개발, 독재 등 당대 거대 담론을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남산 국립극장은 한마디로 기념비적이다. 국립극장에 투영된 기념성을 떠올릴 때 기억할 공간이 또 있다. 바로 국립극장 앞마당에 조성된 분수대 광장이다. 분수대 광장은 조각가인 김세중의 작품으로 알려진다. 이곳은 근대 신무용의 거장 조택원(1907~1976)의 춤비가 세워져 무용계와도 낯설지 않다. 1996년 3월 21일 조택원 작고 20주기를 맞아 국립극장 분수대 광장에 조택원 춤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월간 『춤』지 발행인 조동화의 발의로 무용인들의 자발적 모금운동을 통해 춤비가 세워졌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롭다.

4년 7개월간 진행된 조택원 춤비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에는 1,300명의 국내외 무용가들이 참여하였고, 약 5천만 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춤비는 조택원의 신무용 명작 ‘만종’의 한 장면을 모티브로 최기원 홍익대 교수가 조각했고, 여초 김응현 선생이 비문을 새겼다. 속절없는 세월 속에 분수대 광장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조택원 춤비 또한 국립극장 입구 도로변으로 옮겨지면서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남산 국립극장은 2017년 리모델링을 통해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한다. 변화를 꽤한 계기는 단순 명료했다. 남산 국립극장의 외형이 군사독재 시절 권위주의적 시대상을 대변한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깃들어 있다는 이유가 컸다. 이에 극장 전면의 계단을 철거하고 객석 진입의 동선을 지상층에서 직접 연결되도록 고안했다. 넓게 펼쳐진 계단을 올라 입장하던 것에서 지상층으로 연결된 입구를 통해 에스켈러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는 동선으로 바뀌었다. 대극장의 벽체도 고급한 이미지의 커튼월로 전환하는 등 현대성을 접목하려는 의지의 소산이 강하게 묻어난다. 

알다시피, 국립극장은 1950년 4월 경성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에서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초기 발걸음은 순탄치 못했다. 6.25 전쟁 중 피난지 대구 문화극장을 거쳐 1957년 서울 명동 시공관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1973년 남산자락에 국립극장을 신축하면서 새 시대가 열렸다. 

남산으로 이전하면서 국립극장 소속 예술단체들은 비로소 제대로 된 제작극장으로서의 ‘내 집’을 갖는 꿈을 이뤘다. ‘국립’이라는 이름을 내건 관현악단, 창극단, 합창단, 오페라단, 무용단, 발레단, 국립극단 등 내 집을 갖게 된 국립예술단체는 한 시대를 견인하는 작품창작을 통해 존재감을 과시했다. 

2000년 법인화 조치로 남산 국립극장을 떠난 국립발레단, 국립오페라단, 국립합창단 세 단체는 우면산 자락 예술의전당으로 옮겨갔다. 이들 단체는 그후 지금껏 ‘곁방살이’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소위 작품제작을 위한 독자적인 ‘자기 집’이 없는 셈이다. 집 없이 떠도는 상황에서 명작을 기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

바야흐로 남산 국립극장이 개관한 지 50년이 됐다. 남산 국립극장은 건축사적, 공연예술사적으로 당대 시대정신이 투영된 기념비적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최근 글로벌 이슈 속에 ‘K-순수예술’의 세계화가 주창된다. 국립극장의 공간적 확장과 더불어 곁방살이하는 국립예술단체의 ‘본디 그 집’으로의 복귀는 어떨까. ‘내 집’을 터전으로 이른바 순수예술 분야의 한류를 선도할 창작기반이 만들어지는 플랜이 정부 차원에서 작동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