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계속) 그러던 차에 지자체와 손을 잡고 축제를 기획하던 어느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형님! 근대사 유물 많이 가지고 계시죠? 제가 초대할 테니 출품 좀 해주시죠? 복고풍(Retro) 감성이 뜨고 있어서 판매도 잘 될 겁니다.’ 그렇게 하여 술 수집 과정에서 모으게 된, 추억의 물건들을 싸 들고 축제에 나가게 되었다. ‘어느핸가는 13개의 축제에 초대받았습니다. 판매도 잘 되었지만, 초청비가 쌓이다 보니 꽤 목돈이 되었지요.’ 돈이 생기고 나니 가지고 있던 물건을 처분하지 않아도 되었고, 더 공격적으로 다양하고 희귀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집중할 수도 있게 되었다. 한편, 지역축제를 지속해서 나가다 보니 그 지역 자료를 더 많이 가지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 교복과 교련복, 교표, 지역 전화번호부, 한약방이나 농협에서 만든 달력 등이었다. 여기에 앨범이 더해지니 어디를 가도 보여줄 게 풍성해 축제관계자들도 좋아해 주었다. 추억박물관도 이때 붙이게 된 이름이다.
그렇게 2년쯤 지난 늦여름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날도 목포에서 준비하고 있던 축제장에 물건을 한 트럭 싣고 가 출품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임실로 가려면 거쳐야 하는 길목 언저리에 있던 나주 그 주조장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저녁 시간도 돼 밥도 먹을 심상으로 들르기로 했다.
주조장 근처의 한 식당 앞에 차를 세운 박재호는 주조장 건물을 오랜만에 살펴보았다. 역광 속에서도 주조장은 이전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당당히 서 있었다. 혹시나 해 주조장 주 출입문 쪽으로 돌아서는데 어수선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주조장 본체와 창고를 가르는 골목은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이라 늦더위도 시킬 겸 그곳에서 술자리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그 젊은 사장과, 비슷한 또래의 남성 한 명이 앉아 술판을 가운데 두고 소란스럽게 한껏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제 제법 중년의 티가 나던 사장을 향해 박재호는 겸연쩍게 웃으며 인사를 청했다.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두 사람은 높아가던 언성을 뚝 끊고 박재호를 쳐다봤다. ‘누구시더라? 아! 사장님 왜 한동안 안 오셨어요. 마침 잘 오셨네요. 술 한잔하십시다.’
석양 하늘빛이 더해진 사장의 얼굴에는 벌써 취기가 붉게 올라와 있었다. ‘술 한잔 받으세요.’ 엉겁결에 건네받은 술잔 안으로 사장이 따른 술이 채워졌고, 박재호 역시 우선 반가운 마음에 채 앉기도 전에 술부터 받게 되는 어정쩡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자리에 앉아 막 술잔을 입에 대려는데 ‘사장님 혹시 이 술 드셔보셨어요? 오래 묵힌 술이라 그 맛이 기가 막힙니다.’ 통성명도 하기 전이었지만, 함께 있던 사내가 술병을 들어 박재호 눈앞까지 들이대 보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미 내려앉기 시작한 어둠 속에서 술병을 자세히 보던 박재호는 그만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그 술, 그 네 홉짜리 소주였던 것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말은 차마 할 수 없었지만, 소장가들 사이에서 병당 기백만 원씩에 거래되는 그 술.
‘아니 가게에 가면 마실만 한 술이 널려있을 텐데 왜 이 술을 땄어요?’ 마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순간 박재호의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아니 왜요 있는 술 마시겠다는데…….’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대들 듯 그 사내가 다시 헤집고 들어왔다.
갑자기 막걸리를 주문받았는데, 병이 떨어져 이 술병에 담아 팔려고 깠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놈의 막걸리가 몇 푼이나 한다고. 이 술 두 병값이면 막걸리 수천 병과 맞먹을 텐데 말이다. 그 돈 가지면 이런 흙바닥이 아닌 룸살롱을 몇 번은 가고, 양주가 몇 병일 텐데……. 박재호의 속은 타들어 갔지만, 이 술이 왜 귀한지 왜 마셔서는 안 되는지를 더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저들이 알게 되면 이 술과의 인연은 영영 끊어진다는 사실을 박재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재호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다가 차가 있어 술맛도 제대로 못 본 채 허탈한 마음으로 등을 돌려야만 했다.
차를 세워놓은 식당으로 와서 식사를 주문하는데 식당 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우리 식당에 차 세워 둔 게 한참 전인 것 같은데 어디 다녀오는 거요?’ 주인의 퉁명스러운 그 말에는 왜 안 오지? 차만 세워놓고 가버린 건 아닌가? 하는 우려와 안도가 함께 묻어 있었다. ‘아 네! 요 앞 주조장 좀 다녀오는 길입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왜요? 술사시게? 우리 식당에도 그 주조장에서 만든 드들강먹걸리가 있는데.’, ‘아닙니다. 차가 있어서.’ ‘그럼 왜? 남평주조장, 그 뭐 볼 게 있다고…….’ 답이 없을 것을 알고도 던진 주인의 이 말마저 박재호에게는 야속하게 들려왔다.
주문을 받아 주방으로 들어가는 주인의 이 푸념 섞인 말이 차츰 흐릿해져 갔지만, 박재호의 얼굴에는 빈속에 글라스에 담긴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은 이의 쓰라림이 문신처럼 드리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