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Interview] 박애리 명창 “새로움 더해진 나의 소리가 향하는 곳은 ‘전통’”
[Artist Interview] 박애리 명창 “새로움 더해진 나의 소리가 향하는 곳은 ‘전통’”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4.01.10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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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창극 레퍼토리와 세계인 함께 공감할 보편적 레퍼토리 공존했으면…”
’젊은 국악’은 국악계 전체가 성장할 수 있는 동력
“가장 기억에 남는 국립창극단 <메디아>, 재공연 된다면 참여하고파”
춘향가, 심청가 이어 수궁가 완창 도전…음원 녹음도 예정
“부끄럽지 않을 소리와 예술 활동으로 ’국창’ 칭호 받는 것이 목표”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국립극장 해오름극장 1200석, 달오름극장 500석 전석 매진 행렬. 대극장 뮤지컬이 아닌 국립창극단의 성과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시작된 창극단의 인기는 가장 최근 공연이었던 11월 <패왕별희>까지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국립창극단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레퍼토리 시즌을 도입하면서 부터다. 창극이 다루지 않았던 다양한 소재들을 국내외 저명 연출가 중심으로 창극화하며, 기존과는 사뭇 다른 행보로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올렸다 하면 전석매진’ 기록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1999년에 입단해 17년간 국립창극단원으로 활동한 박애리는 창극단 인기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대중성의 확보’라며 “예나 지금이나 국악계에 스타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늘 있었는데, 지금처럼 매체를 통해 사람들이 국악에 많은 관심을 가졌더라면 창극단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조금 더 일찍 시작됐을 것”이라 말한다. 

▲박애리 명창
▲박애리 명창

박애리는 아홉 살에 판소리에 입문해, 안애란 명창에게 춘향가 한바탕을 7년여에 걸쳐 공부했다. 대학 재학 중 판소리꾼들의 전문공연예술단체인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의 회원으로 활동한 바 있는 박애리는 1999년 입단부터 2015년 퇴단까지 국립창극단에서 각설이패, 초란이패, 흥보 아들부터 향단이 그리고 수많은 작품의 주요 배역을 맡으며 차근차근 성장해왔다. 

자신의 예술 세계를 넓히는 일이 궁극적으로 ‘진정한 소리꾼’이 되는 길이라는 생각에,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소리를 전하는 박애리 명창은 대중적 인기만 누리는 것이 아닌, 판소리를 제대로 잘하는 ‘명창’의 칭호와 무게를 수시로 되새기며 끊임없이 소리를 갈고 닦고 있다. 무대와 방송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의 올해 가장 큰 목표는 ‘완창’이다. 춘향가와 심청가 완창에 이어 수궁가 완창에 도전하려는 박애리는 소리에 정진하는 순간이 비로소 자신을 채우는 시간이라 말한다. 

지난 12월, 국립창극단의 발전 방향을 논의하는 심포지엄에 종합토론 패널로 참석한 박애리 명창은 17년간의 창극단원 활동을 바탕으로 제언을 하고자 했으나, 시간 관계상 발언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현장에서 함께 지켜보던 기자는 미처 전하지 못 한 말이 궁금했고, 창극단의 성장 과정을 지켜봐 온 그의 의미 있는 메시지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인터뷰를 진행하게 됐다. 꾸준한 노력을 통해 채운 내면의 소리에 재능을 더해 대중과 문화로써 소통하는 박애리 명창을, 지난 2018년 인터뷰 이후 약 6년 만에 서울 마포구 모처에서 만났다.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밝았다. 지난 한 해는 어떠했고, 올해 첫 일정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주변에 많은 분이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흐름이 시속으로 느껴질 만큼 빨리 지나갈 거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지난 한 해는 유독 더 빠르게 느껴졌다. 1년 내내 공연이 많았고 특히 가을과 겨울에 접어들면서 해외 일정까지 있어서 굉장히 바쁘게 지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관객들과 마주할 수 있는 공연들이 많았다. 판소리, 방송, 가요 등 다양한 무대를 선보일 수 있었다. 

작년 2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가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세상을 마주하는 자세를 재정비하게 됐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어떤 일을 하고 싶다라기 보다, 어떤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가에 대한 고민을 더 하게 됐다. 

올해 첫 신년음악회에서는 판소리와 남도민요를 함께 선보이는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올 한 해는 ‘원형 콘텐츠’에 보다 집중해보려 한다. 우리 소리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많은 분께 선보이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해로 만들고 싶다. 그동안 굉장히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관객에게 보다 편하고 친근하게 우리 소리를 전달하려 노력해왔다. 이러한 다채로운 작업들 역시 굉장히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들이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시대에 발맞춰 요즘 관객들이 뭘 좋아하는지 함께 소통하고 교감하며 만들어지는 공연들도 분명히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통을 너무 등한시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라져버리고 흐름이 끊겨버릴까 봐 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전통을 잘 이어 나가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것이, 첫 번째 나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국립극장에서는 국립창극단 방향성 논의를 위한 포럼이 열렸다. 이날 자리에서, ‘전통과 새로움 두 가지가 공존하면 좋겠다’는 제언을 한 바 있는데, 창극단원으로 활동했던 입장에서 바라보는 창극단의 성장 모습은 어떠한가?

전통과 새로움 사이에서의 방황과 고민이 레퍼토리 구성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적인 흐름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국악계에 스타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늘 있었는데, 지금처럼 매체를 통해 사람들이 국악에 많은 관심을 가졌더라면 창극단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조금 더 일찍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당시에도 좋은 작품들이 정말 많았다. 더불어, 내가 창극단에 있는 17년 동안 관람객들의 구성도 많이 달라졌다. 초기에는 소리를 좋아하는 매니아들이 관객의 대다수였고, 그러다 보니 유료 관객만으로 객석을 다 채우는 것이 어려웠다. 그런데 레퍼토리도 다양해지고, 국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졌으며 국악계 젊은 스타들이 함께 생겨난 현재는 자리가 없어서 못 볼 정도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게 됐다. 

최근 몇 년간, 창극단은 우리가 알고 있던 이야기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거나 원작을 비틀어서 새롭게 각색한 작품들을 많이 선보이고 있다. 지난 포럼에서 ‘전통 창극 레퍼토리와 세계인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레퍼토리가 공존했으면 좋겠다’라는 발언을 한 것은,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레퍼토리에만 집중하게 되면 전형적인 창극의 모습 자체가 사라져버릴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굳이 틀을 만들어 창극을 규정지을 필요는 없지만, 세계 무대에서 ‘창극은 이런 것이다’라며 소개할 때, 가장 창극스러운 모습을 담고 있는 작품도 함께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현대적인, 새로운 소재의 공연만 올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원래 창극은 이런 거였어요’ 하고 옛 자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선보이는 가장 한국적인 무대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도 관객들에게 함께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창극이 큰 사랑을 받는 이때, 예전 작품들이 재공연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비교적 최근에 선보여진 작품들은 앵콜 공연을 하고 있지만, 더 이전의 작품 중 오랜 기간 무대에 다시 오르지 못하는 완성도 높은 것들도 많아 아쉬움이 있다. 가요도 계속 리메이크 되는 것처럼 창극도 예전 작품들을 다시금 재정비하여 올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지난달에는 네덜란드 국빈 초청 답례 공연에 참여해 남상일 명창과, 네덜란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이야기를 입체창 형식으로 선보였다. 다소 독특한 형태의 이 공연은 어떻게 준비하게 됐고, 현지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국빈이 다른 나라에 방문하셨을 때 그 나라에서 자국의 공연을 선보이는 일은 자연스럽지만, 화답 공연을 선보이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들었다. 게다가 그 화답 공연은 1시간이 오롯이 전통 공연으로만 채워졌다. 판굿 길놀이로 시작해 (문체부) 장관님이 축문을 읽고, 판소리와 승무, 장구춤, 정가까지 모두 모인 전통 예술 공연의 집합체였다. 가장 전통적인 공연을 다른 나라에서 선보였다는 자체로도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와 남창일 명창은 판소리에서 창극으로 넘어가기 바로 전 단계인 ‘입체창’ 형식의 사랑가를 선보이기로 했다. 그런데 공연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브릿지 공연으로 입체창 앞에 네덜란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우리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네덜란드와 한국이 화합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준비 기간이 굉장히 촉박했지만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춘향과 이몽룡이 나누는 대화 속에 에라스무스를 소개하는 내용을 녹였다. 두루마리라든지 좀 예스러운 소품들을 활용해 가사를 보고 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신다고 했지만, 2~3일 정도 시간이 있으니 우리가 숙지해서 공연하겠다고 전했다. 그래야 관객들에게 더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현지 관객을 비롯해 그날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공연에 스며들어 하나가 된 듯했다. 공연이 끝난 후, 네덜란드 국왕 내외가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를 자세하게 듣고 싶어 하셨다. 우리 공연의 일부를 보여줌으로써 전체를 궁금해하고 관심을 갖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 같아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다. 

▲지난 2018년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인터뷰 당시 박애리와 팝핀현준
▲지난 2018년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인터뷰 당시 박애리와 팝핀현준

그간 남편 팝핀현준과의 콜라보 무대를 비롯해 국악을 알릴 수 있다면 장르에 구분을 두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한 결과, 국악의 문턱이 전보다 많이 낮아졌음을 체감한다. 특히, 국악은 어르신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에서 ‘젊은 국악’이 강세인데, 실제 공연을 하면서도 관객 연령대의 변화를 체감하는지?

관객의 연령 폭이 굉장히 넓어졌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국악이 부모님 세대만의 전유물 취급을 받았지만, 요즘은 젊은 세대의 관심이 전보다 훨씬 높아졌음을 체감한다. 

전통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다. 우리 음악이 이렇게 신명나고 모든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으며,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많은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사실 우리 선배님들 더 나아가 선생님들 세대부터 끊임없이 이뤄져 왔지만, 방송이라는 매체를 통하며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된 것 같다. 앞으로도 전통 음악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하나만 잘 되는 걸로는 전체가 성장할 수 없지만, 전체가 성장하면 그 안의 일원인 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각자의 위치에서 다방면으로 활약하고 있는 국악인들의 활동 하나하나가 모이다 보면 언젠가 (우리 음악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일찍이 국악과 더불어 외부 활동을 활발하게 해왔는데, 주변의 우려와 만류도 많았을 것 같다.

20대 중후반에 드라마 대장금 주제곡을 부르고, SG워너비 ‘아리랑’의 피처링을 하는 등 외부 활동을 시작할 당시, 선생님들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다. 선생님들이 생각하셨을 땐, 국립창극단에서 차세대 명창으로 한참 주목받으며 주연 배우로서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 할 중요한 시기에 다른 데 신경을 쓰는 것이 염려스러우셨던 것 같다. 주변에선 ‘외도’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으니, 나조차도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포털사이트 지식인에 어떤 분이 ‘SG워너비 아리랑 노래 중 어떤 여자분이 나와서 하는 그게 뭔가요? 그게 판소리인 건가요? 그 소리만 들으면 전율이 일고 너무 좋아요’라는 내용의 글을 보게 됐다. 그걸 보고 내가 틀린 게 아니었다는 확신을 처음 갖게 됐다. 나의 소리가 국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지 않나. 

더불어, 지금은 돌아가신 성창순 선생님은 나의 가장 큰 지지자셨다. 하루는, 오랜만에 선생님을 뵙는 자리에서 지레 겁을 먹고 “선생님 저 요즘 소리 연습도 공연도 많이 하고 있는데 자꾸 그렇지 않은 모습만 보여드리는 것 같아서요. 사람들은 보여지는 것만 우선 믿잖아요”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쏟아낸 적이 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무슨 소리야, 너무 잘 보고 있어. 그렇게 보여줄 수 있는 게 많고 담아낼 수 있는 게 많은데 왜 이것만 해야 된다고 생각해. 나는 너네 신랑한테 상이라도 주고 싶다”라고 말씀해주셨다. 남편과 함께 만드는 콘텐츠들이 국악을 좀 더 가까이 느끼게끔 하는 소중한 작업인 것 같다고 하시면서. 

국립창극단 <아비, 방연> 작창 당시, 도창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었는데 새로운 작품의 작창 혹은 도창은 계획에 없는지? 

작창은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걸 경험을 통해 알았다. 지금까지 세 작품 정도 작창을 했는데, 그냥 짧은 소리를 작창하는 것과 작품 전체를 하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여러 캐릭터의 면모를 짜임새 있게 드러내면서 음악을 어떻게 진행시키느냐에 따라 극의 흐름이 결정된다. 서재형 연출님이 나에게 작창을 맡기신 마음과 내가 임하는 자세는 같았다. 내가 이 배우라면 이렇게 표현할 거야, 이 텍스트를 이런 흐름으로 가져갈 것 같아. 작품 전체의 인물 하나하나가 되어보는 마음으로 작창을 했다. 밤낮없이 시간 가리지 않고 매진해서 했던 기억이 있다. 정말 힘들었지만 그만큼 재밌고 보람도 있었다. 말과 음악은 조금 다르다. 작품 안에서 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게 음악이다. 선율과 장단의 도움을 받아, 구구절절 전부 읊어내지 않으면서도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작창이라는 게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완성도 높은 음악을 남겨두고 싶은 열망이 있다. 

도창은 작품을 한 걸음 여에 비껴서서 이야기 전체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한다. 도차이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가느냐에 따라 작품의 무게감과 관객들의 몰입도가 달라진다. 대체로 도창은 전통 레퍼토리를 작품화할 때 꼭 등장하지만, 전통 작품뿐만 아니라 새로운 작품에서도 그런 구성이 가능하다. 도창을 하게 된다면 에너지를 담아 재미나게 보여드리고 싶다.

올해 7월 말부터 ‘국악진흥법’이 시행될 예정이다. 우리 국악을 전승ㆍ보존하는 과정에서 예술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지원 혹은 정책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젊은 세대들도 그렇지만 선생님들 연배에 계신 분들의 무대, 공연 기회가 많지 않다. 단체에 소속된 분들보다 개별적으로 무대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훨씬 많다. 세대 구분 없이 국악인들이 설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펼칠 수 있는 무대 자체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전통의 모습 그대로 혹은 새로운 시도를 통한 국악을 선보이고 싶은 국악인들은 정말 많지만, 지원이 굉장히 한정적이고 금액적인 부분도 그리 넉넉하지 않다. 무대에 올리고 싶은 콘텐츠를 실현할 수 있는 자본적 뒷받침과 이 공연을 널리 알릴 수 있는 홍보 마케팅 등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국악인을 위한 다방면의 지원들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지금 가장 절실하다. 

▲지난 2013년 무대에 올랐던 국립창극단 <메디아>에서 메디아 역을 맡았던 박애리의 공연 장면
▲지난 2013년 무대에 올랐던 국립창극단 <메디아>에서 메디아 역을 맡았던 박애리의 공연 장면

기억에 남는 공연 세 가지를 꼽는다면?

가장 먼저 국립창극단 <메디아>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결혼 후 아이가 3~4살 가량 됐을 때 했던 작품이다. 그리스 3대 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 <메디아>를 서재형 연출님과 한아름 작가님에 의해 창극의 옷을 입은 것이다. 음악은 작창이 아니라 작곡이 돼서 악보를 보고 배우들이 소리화했다. 음표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은 배우의 역량으로 소리적인 느낌을 실어 불렀다. 탄탄한 대본과 연출력에 황호준 선생님의 곡이 더해진 작품의 힘이 엄청났다. 동시에, 연습을 한 번 하고 나면 내 뼈가 녹아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쉽지 않았다. 

작품의 마지막,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들을 욕조에서 직접 칼로 찌르는 장면이 있다.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후 소리인지 울음인지 모를 구음으로 몇 분간을 오열하며 모든 것을 쏟아내는데, 그 장면을 연기하며 ‘소리라는 게 이런 힘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감정들을 다 긁어모아서 표출했기 때문에 음악으로 한정 짓기 어려운, 어떤 소리만의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한 아이의 엄마였기에 그 역할에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성격상 살면서 한 번도 누가 그렇게 미웠던 적도 없고, 크게 분노해 본 적이 없다. 작품을 통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느끼고 표현하며 내 안의 새로움을 발견하게 된 순간이었다. 

남편 이아손 역할을 김준수 씨가 맡았었다. 당시 신입 단원이었는데, 준수 씨가 정말 착하다. 그런데 이아손은 굉장히 나쁜 사람이지 않냐. 자기 야망을 위해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하는. 이 역을 준수 씨가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연출님은 준수 씨의 인간적인 면모에서는 전혀 나쁜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표정이나 연기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웃음) 꽤 오래된 작품이라 못 보신 분들도 많으실 텐데, 언젠가 꼭 다시 무대에 오르길 바라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참여하고 싶은 작품이다. 

또 하나의 작품은 <우루왕>이다. 국립극단과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모두 참여했고, 당시 국립극장장이시던 김명곤 선생님이 대본과 총감독을 맡으셨고, 안숙선 선생님이 작창을, 원일 감독님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하신 대작이었다. 이 작품이 나에게 특별한 이유는 첫 주연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3살에 창극단에 입단했는데, 24살에 우루왕과 배비장전의 주연을 맡게 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한국의 ‘바리데기’가 더해진 이 작품에서 원래 나의 역할은 광대 10이었다. 광대는 10명이었고. 연습을 하던 중 바리공주를 맡았던 배우가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한 날이 있었다. 바리공주 노래를 다 아는 사람이 전체 통틀어 나밖에 없었고, 그날 연습 이후 원캐스트였던 바리공주는 나를 포함한 더블 캐스팅으로 바뀌게 됐다. 결정이 나기 전, 김명곤 선생님에게 면접을 보러 가서 “당장 잘할 수 있다는 말씀은 드리기 어렵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다”라고 말했다. 24살짜리 애가 그렇게 말하니, 선생님은 헛웃음을 지으시더니 “그래, 한 번 해보자”라고 하셨다. 어린 나에게 찾아온 뜻밖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첫 주연작은 의미가 남다르다.

마지막은 팝핀현준 씨와 ‘가장 우리다운 결혼을 하자’라며 만들었던 웨딩 콘서트 <그와 그녀의 이야기>를 꼽고 싶다.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 직접 대관 신청서를 써서 대관을 하고, 우리에게 어울리는 결혼식을 공연으로 하객들에게 선보였다. 결혼식 이후에도 가끔 그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덕분에 결혼을 여러 번 했다.(웃음)

올해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지?

춘향가와 심청가 완창에 이어 올해는 수궁가 완창에도 도전해보려 한다. 수궁가는 뒤에 끝맺음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대목들이 몇 개 남아 있다. 그것들을 채워가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올해는 내가 그동안 미처 채워놓지 못했던 것들을 채우며 나를 구축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새해 다짐을 했다. 바쁜 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조금 숨통이 트이는 이때 녹음 작업도 해볼 생각이다. 춘향가와 심청가를 음원으로 만들려는 계획은 작년부터 세웠는데, 그 시기에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서 컨디션 난조로 녹음을 진행하지 못했다. 올해는 공연을 조금 줄여서라도 소리의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해보려 한다. 

어떤 국악인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임방울 선생님, 김소희 선생님은 판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분들의 존함을 들어봤을 거고, 이분들의 소리를 기억하지 못해도 예술가로서 어떤 반열에 올랐는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이다. 명창도 부족해서 국창이라는 칭호를 더 해드리지 않나. 그만큼 소리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위로해주고 감동을 주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두 번의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이름 뒤에 명창이라는 호칭을 감사하게도 붙여주시지만 지금까지는 그 단어가 너무 무겁게만 느껴졌다. 여러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지금은, 내가 부끄러움 없이 이 칭호를 들을 수 있을 만한 길을 걷고 있나,라는 질문을 저 자신에게 던져보기도 한다. 하지만 언젠가 제가 죽은 후에라도, 사람들이 박애리라는 사람을 떠올렸을 때 ‘명창이라는 칭호만으로는 아깝지. 박애리는 국창이지’라고 기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국창이라는 칭호가 너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전통의 깊이를 간직하면서도 여러 것들에 편견을 두지 않고 도전하는 매력적인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