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구본창의 항해기, 그 서사를 듣다
[Special Interview] 구본창의 항해기, 그 서사를 듣다
  • 이은영 발행인·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1.10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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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의 이야기와 역사에 늘 관심 두고 있어
늘 대상의 속마음과 사연 생각해보며 작업해와
고려청자 아닌 조선백자 선택한 건 내게 적합한 테마였기 때문...화려한 건 나와 어울리지 않았을 것
공간에는 저마다의 서사와 역사성, 존재와 부재가 깃든다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김연신 기자] 지난달 개막한 《구본창의 항해》展에는 평일임에도 관람객이 가득했다. 그 사이에 이상하게 작품이 걸려있지 않은 빈 벽을 찍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다름 아닌 구본창 작가였다. 이날 있을 인터뷰를 위해 전시장을 찾은 작가는 마침 도록에 실릴 사진을 위해 공간의 구도를 살펴보던 참이었다. 왜 하필 작품이 걸려있지 않은 빈 벽을 찍고 있었느냐 물었더니 “사진은 없지만 완전히 원으로 이루어진 동그란 공간 자체가 매력이 있지 않나 싶어서 찍고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시장 벽 앞에 선 구본창 작가 ⓒ김연신 기자
▲전시장 벽 앞에 서 있던 구본창 작가 ⓒ김연신 기자

무엇이든 새로운 시각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곤 하는 구본창 작가는 한국 현대사진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왔다. 그는 사진이 “기록이라는 전통적 역할에서 벗어나 회화, 조각, 판화 등 다양한 매체의 속성이 반영된 주관적인 표현을 담은 예술세계”라고 말한다. 필름을 그대로 두지 않고 칼로 긁는다던가, 콜라주를 해서 오버랩 시킨다던가 하는 실험적이고도 회화적인 시도를 통해 사진을 현대미술의 장르로 확장해왔다.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은 구본창 이후로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매일이 서른 여덟”이라고 말한다. 그의 호기심은 세상을 어린 아이처럼 언제나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끔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기 하나하나가 모이고 보통 사람들의 삶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역사가 되듯이,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의 이야기와 역사에 늘 관심을 두고 있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에겐 평범한 이야기들도 모두 새롭게 와닿는다. 전시장에서 마주치는 관객들이나 작은 인연도 그에게는 특별하다. 이날 작가는 전시장에서 같이 사진을 찍자며 말을 걸어온 관객들과도 긴 대화를 나눴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와 온화한 미소에는 작은 것들에 기울이는 세심한 관심이 묻어났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물과 세상을 매번 새롭게 보려는 작가의 시각을 16개의 방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다. 각각의 섹션이 마치 ‘방’과 같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품 하나하나가 작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큼 각각의 섹션에서는 방문을 열고 작가의 한 시절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작가와 큐레이터가 고심해 추리고 선별한 500여 점의 작품은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작가가 작품들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 그를 직접 만나 그간의 항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긴 오후의 미행 007, 1987, 젤라틴 실버 프린트, 세피아 톤, 23×33.5cm
▲긴 오후의 미행 007, 1987, 젤라틴 실버 프린트, 세피아 톤, 23x33.5cm (사진=서울시립미술관)

- 전시 제목이 무려 ‘구본창의 항해’다. 작가에게 이번 회고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전시 제목은 고민을 많이 했다. 멋들어지게 형이상학적인 단어를 쓸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던 와중, 큐레이터에게 전시장 입구에 걸린 사진인 상주 해수욕장에서 미래를 동경하던 사진 이야길 했더니 인상 깊게 듣고는 그걸로 이야기를 풀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여정이 결국 한 사람의 항해가 아닌가 싶어 결국 ‘구본창의 항해’라는 제목을 쓰게 됐다. 주변에서는 너무 쉽고 직관적이지 않나, 존재나 인생 같은 좀 더 멋드러진 말들이 있지 않느냐 했지만 항해라는 말을 자꾸 듣다보니 있는 그대로 편하게 쓰는게 좋겠다 싶었다.

이번 전시는 작품을 대체로 시간 순으로 배치했다. 내가 살아온 경험에 따라 작품도 비슷하게 무언가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그 시간을 벗어나지 않도록 했다. 

- 작품을 보면 작가가 이야기꾼과 같이 느껴진다. 

항상 무언가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에 관심이 많다. <나비>시리즈 같은 경우는 신문에서 석주명 선생의 기사를 읽으면서 시작됐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냥 ‘이런 사람이 있구나’라고 넘길 법한 것들도 지나치지 않는 편이다. 이것도 머릿속에서 짜맞추고 스토리를 찾아내는 능력이 있어서인 것도 같다. (웃음)

한 장의 사진으로 끝내기보다는 시리즈 작업을 많이 해왔다. 항상 이야기가 들어있는 작품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기에 문학적인 영감이나 상황이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하다. 작품명도 보면 유럽에서 스냅 위주로 찍었던 초기 작업들만 제목이 없고, 나머지는 제목을 지을 때도 고민을 많이 했다. 작품을 완성한 후 제목을 짓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 단어를 떠올리고 그 단어에 집중해 찍었던 사진을 분류하고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80년대 한국에서는 ‘긴 오후의 미행’이나 ‘1분간의 독백’과 같이 작품 제목을 문학적으로 짓는 작가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 작가 중 제목을 가장 멋있게 짓는 사람이 구본창이다”라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모델을 찍을 때도 그의 사연을 담고 싶다. 단순히 멋지고 잘생긴 얼굴이 아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속마음이나 사연을 항상 생각하며 작업을 한다. 그런 생각과 작업 방식이 이야기꾼처럼 보이게 하는 것 같다.

▲인터뷰 도중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 구본창 작가. ⓒ김연신 기자
▲인터뷰 도중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 구본창 작가. ⓒ김연신 기자

- 작가의 전시를 두고 꼭 여러 사람이 참여한 전시라고 믿을 만큼의 다양성을 품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다. 그 다양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다양한 표현 방법을 총동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호기심이 정말 많다. 기자재는 관심이 없으나 인화지, 용지, 칼라표현 등 새로운 도구나 표현 방법은 작업에 어떻게 적용시킬 지 고민을 많이 한다. 

시기별로 변화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있다. 표현 방법 뿐만이 아닌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20대, 30대, 40대, 50대...이렇게 시기별로 계속 변화했다. 초기의 방식인 스냅 촬영만 고집했다면 초기 유학 시절 작품들이나 <긴 오후의 미행>과 같이 한국에서 1950년대에 했던 작업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고, <백자>시리즈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풍경 또한 다양한 면을 찍도록 노력했는데, 한동안은 도시를 계속 찍다보니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80년대에는 남아 있는 근대의 흔적과 변화가 충돌하는 지역과 같은 것들이 신선하고 찍는 맛도 있었는데 90년대에 접어들며 전국이 서울처럼 돼버리니까 도시를 찍고 싶지 않아졌다. 상가나 음식점 하나하나에도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획일화되면서 장소가 지니고 있던 역사성이 사라지니 매력이 없게 느껴졌다. 요즘은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파서 여행도 못 가겠다. (웃음)

어려움이나 즐거움이 있던 시기마다 그에 따라 작품도, 소재도 변화하기 때문에 환경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화해온 것 같다. 

- 사진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담고 싶다고 말해왔다. 작가가 사물을 볼 때 어떤 기준으로 표면과 본질을 구분하여 읽는지 궁금하다. 또한, 표면을 걷어내고 그 안에 자리 잡은 본질을 프레임 안에 포착해내는 과정이 궁금하다.

표면이 결국은 선입관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도 그렇고 다른 대상도 그렇고 선입관을 버리고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 내가 제일 노력하고 있는 부분이다. 금관으로 예를 들자면, 기존에 우리가 알던 모습으로 드리개가 있고, 거치대 위에 서있는 모습이 있다면, 그 모습을 버리고 새롭게 바라보고 보여줄 방법은 없는지 고민한다. 유명한 배우를 찍더라도 남들이 찍은 사진을 먼저 훑어본다. 이 사람이 보통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파악하고 그것과는 다르게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과 인생을 알아보고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찍으려고 노력한다. 독일에서 유학할 때도 “기존에 알던 것들을 버려라”는 것이 가장 처음 배운 거였다. 예를 들자면 의자를 그리라고 한다면 보지 않고서도 그릴 수 있는 태도를 버리라는 것이다. 눈 앞에 있는 남자를 그린다고 해도, ‘그 남자’를 그려야지 기존에 알고 있는 남자를 그리면 안 된다. 

<비누> 시리즈로 예를 들자면, 생긴 것의 아름다움과 세월의 흔적도 있지만, 무언가를 깨끗하게 만들어주고 본인은 사라지는 속성이라던가, 조금 지나면 없어질 것이라는 그 애처로움이 와닿았다. 나는 물건이 정말 쓸모가 없어질 때 까지 옆에 두는 습관이 있는데, 비누가 너무 애틋하게 느껴졌다. 색깔도 향기도 다양한 게 보석 같이 아름다운데, 잠시 여행을 다녀오면 말라버리고 오래 된 주름이 생겨 있는 걸 보며 나는 ‘이거 참 아름답기도 하고 애틋하다’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밖에도, 대상이 잘 드러날 수 있는 최적의 배경을 열성을 다해 찾는다. 대상이 어떤 배경에 서 있어야 온전히 제 몫을 할지 고민한다. 주변이 있기에 대상이 드러나는 것이고, 50:50으로 대상만큼 주변이 중요하다고 배워 왔다.

▲이타미준 소장 백자 촬영 장면(2010)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이타미준 소장 백자 촬영 장면(2010) (사진=서울시립미술관)

- 구본창 작가를 떠올리면 백자 작업이 대중들에게 각인이 돼 있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백자의 역사성을 기록하는데 이어, 청화백자, 금관까지 이어졌다. 그 작업 과정이 녹록치 않았는데, 일부에서는 국가가 할 일을 개인이 했다고도 한다. 그간의 얘기를 듣고 싶다.

당시엔 정말 발벗고 다녔다. 어디서 지원 받으려고 애쓰는걸 잘 못하는데, 일본 정도니까 내돈으로 가서 해야지 하고 시작했던 게 지구를 몇 바퀴는 돌게 됐다. 당시에는 흩어진 백자를 그렇게 모으는게 작가로서 해야될 것 숙명처럼 느껴졌다. 

1989년에 우연히 봤던 루시 리가 백자와 찍은 사진이 뇌리에 박혔다. 당시에는 그 여성이 루시 리인줄도 모르고,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이건 조선 백자인데 왜 서글프게 외국 사람 옆에 놓여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백자가 원치 않는데 그 곳에 끌려가 있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걸 언젠가 찾아와야지 머릿속으로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한국에 와서 적응하기 어렵던 시기라 백자를 찍으러 다닐 경황이 없었다. 이후로 그 사진을 찾으려고 온갖 책을 다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이후 2004년에 일본 여성잡지에 조선백자가 특집으로 실린걸 봤다. 임진왜란 때 우리 도공들이 끌려가고 이런 이야기는 수 없이 들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청자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상황에서, 조선백자 특집이 몇 페이지나 차지할 정도로 일본 주부들이 우리 백자를 즐기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속이 상했다. 당시에는 한국 사람이 백자를 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었는데, 잡지를 보니 너무 다양한 형태의 백자들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자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마침 ‘비어있는 것’을 집중적으로 찍고 있던지라, 내부가 텅 비어서 매력이 있다는 점에도 이끌렸다. ‘왜 내가 이걸 찍을 생각을 못 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러가지가 잘 맞았던 것 같다. 

그해 백자를 찍으러 일본을 방문했다.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에서 일본인 큐레이터에게 그 사진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야기를 듣더니 들어가서 그 사진이 실린 카탈로그를 들고 오는 것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물었더니, 자기네 미술관에서 1989년에 그 사람 개인전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그동안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사진으로라도 영혼을 담아 한국에 보여주고자 생각하며 처음 백자를 찍기로 마음먹은지 무려 15년 뒤에 작업을 하게 됐다. 

김환기 선생이나 도상봉 선생도 백자를 소재로 작업을 했지만, 화가들이나 도자에 관심있던 사람들이 아닌 대중들이 백자와 달항아리에 대해 인식하게 된건 내 전시와 매스컴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아시안아트뮤지엄이나 필라델피아박물관은 내 사진과 함께 조선 백자를 전시했다. 큰 홀에 백자만 전시하면 사실 볼품이 나지 않는데, 가운데에 작품들이 쭉 놓여 있고 벽에 큰 사진이 걸려 있으니 홀이 꽉 차는 느낌도 났다. 그렇게 하면서 한국 도자기를 소장하고 있던 해외 박물관들도 점차 조선 백자를 내놓게 됐다. 옛날에는 중국이나 일본 도자기 전시를 많이 했는데 그렇게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지금처럼 달항아리가 주목 받게 된 것 같다. 

최근에는 경주박물관과 협업해서 금관을 찍었다. 교과서에서 보는 사진에서는 금관이 항상 드리개와 나와 있는데, 금관 자체의 위용이 살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허가를 받고 드리개를 떼고 거치대 없이 금관에 집중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1월 말쯤 사진집이 나올 예정이다. 

▲백자 시리즈 앞에 선 구본창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백자 시리즈 앞에 선 구본창 작가 ⓒ이은영 발행인

- 백자의 어떤 매력에 끌렸는지 궁금하다.

화려하고 무늬가 눈에 띄는 중국이나 일본 도자에 비해 조선 백자는 색깔이 완전히 하얗지도 않고 올망졸망해서 외국에서도 예술에 식견을 갖춘 사람만 그 존재감과 아름다움을 알아보곤 한다. 고려청자가 아닌 조선백자를 선택한 건 조선백자가 나에게 적합한 테마였기 때문이다. 고려청자는 빼어나게 아름답고 귀족적이라면, 백자는 수수하고, 무늬도 없는데다가 완벽하게 아름답지도 않다. 손맛이 있다거나 수더분한 맛이 있다고 얘기하듯, 비대칭인데다가 완벽하지 않은 그런 맛에 끌렸다. 그동안 찍어온 물건들이 대부분 눈에 띄지도 않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내가 의미를 부여한 것들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맞아 떨어지니 내 작품이 됐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것을 마냥 예쁘게 찍으려고 했다면 작품이 이렇게 내 것으로 밀착되지 않았을 것이다. 잘 드러나지 않는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나를 통해서 아름답게 보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나와 적합한 테마라고 여겨졌다. 

- 1997년 <샘> 시리즈, 1998년 <리버런> 시리즈, 1999년 <오션> 시리즈 등 1990년 후반에는 물, 물결을 많이 담았는데 애착을 가진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물이 모든 것을 치유하고. 생명의 원천이라고들 생각한다. 끊임없이 물이 솟아오르는 샘을 생각하면서 파도가 치는 것을 데칼코마니로 만들었다. 바다를 지구의 자궁이라 칭하듯,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새로운 생명력을 느끼고 싶었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에 바다에 집착해서 물을 많이 찍은 것 같다. 

- 빈 박스와 차고를 촬영한 작품이나, 이방인으로서 마주한 공간들 등 공간적 특성이 드러나거나 은폐되는 작품들이 있었다. 또, 작가에게 ‘집’은 몹시 중요한 공간이라고 알고 있다. 작가에게 공간은 사물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가? 작가에게 공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듣고 싶다.

물을 찍은 다음에 점차적으로 화면에서 뭔가 비우려는 시도를 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는 강하게 꽉 채워서 감동을 주려고 했다면, 오십이 넘어가면서는 여백의 미를 보여주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됐다. 빈 박스와 차고에서 들어 있다가 나가버린 존재와 부재의 상황을 사진으로서 느끼게 하면 어떨까 싶어서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공간이라는 것은 존재와 부재가 깃드는 공간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의미를 가진다. 어렸을 때부터 쓸데없는 수집품들을 많이 모았는데, 수집품들은 박스에 담아야 하지 않나. 그래서 그런지 나는 빈 박스에 대한 애정이 너무 많다. 박스와 집은 뭔가 들어있는 것이자 자기의 공간이다. 나한테 집은 숨어들어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내 스튜디오는, 껍질처럼 들어가면 단단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특히 어린 시절과 다르게 수집품들을 두고 “갖다 버려라, 왜 이런 걸 모으냐” 잔소리할 사람이 없으니 열심히 공간을 채우고 있다. (웃음)

- 그렇다면 오늘날의 작품의 방향성은 어떠한지, 또 새롭게 하고 싶은 작업이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 1년은 항해의 방향을 정할 것도 없이 시립미술관 전시를 따라왔다. 사진작가로서 한국의 전통이나 유물을 새로이 조명해서 우리 문화를 드러나게 하는것이 참 보람이 있다. 알다시피 수집광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박물관을 많이 들르고, 애정이 있어서 유물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에 유물이 가진 매력을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살아서 조금이라도 기회가 온다면 우리나라의 여러 문화유산 중 새롭게 해석해서 빛나게 해줄 수 있는 게 또 무엇이 있을까 항상 머릿속에서 고민한다. 금관 말고도, 사발도 찍고 싶고, 목가구도 찍고 싶다. 또, 황금으로 된 신라 유물도 제대로 보여 조선 백자 뿐만이 아닌 신라 유물도 해외에서 주목 받게 하고 싶다는 게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목가구 같은 경우는 도록밖에 없는 상태고, 배경 때문에 찍기가 굉장히 어렵다. 크기가 어느정도 있는 가구를 찍으려면 별도의 공간을 만들거나 해야해서 쉽게 드나들고 움직일수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가구를 보면 원시적이면서도 투박한 맛이 있고 참 매력적인데 카탈로그 말고는 해외에 보여진 적이 없는 것 같다. 요즘 이태리 가구나 스칸디나비아 가구, 미드 센트리 모던 등이 유행하는걸보고 우리 가구들도 참 좋은데 싶어 안타까웠다. 내가 잘찍으면 또 엠지세대들이 우리 가구들을 사려고 할지도 모른다. (웃음) 그 정도로 우리 가구의 매력이 아직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또 나는 탈북자에도 관심이 많다. 대접도 못하고 적응도 못하는것이 가슴이 아파서 관련 작업을 시작 했었다. 사람들은 내가 비누 사진처럼 예쁜 사진을 찍는다고 그러는데 비누는 아주 작은 서사지만, 이렇게 신문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일들에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하나하나가 다 역사로 느껴진다. 비누의 역사, 인물의 역사, 백자도 어쩌다가 걔가 흩어져서 일본의 박물관까지 갔고, 그걸 다시 사진으로 가져오고 싶어서 기록한 그 모든 것도 큰 흐름에서는 역사라고 느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기 하나하나가 모이고 보통 사람들의 삶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역사가 되듯이,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의 이야기와 역사에 늘 관심을 두고 있다.

▲구본창 작가의 수집품
▲구본창 작가의 수집품 (사진=서울시립미술관)

- 지난 인터뷰들을 찾아보니, 문학, 영화 등 타분야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작업 방식에 대해 하루키를 이야기했었고, 이번 전시는 데미안의 한 구절로 시작된다. 문학이 주는 영감의 영향을 받은 작품은 설명해줄 수 있는가?

문학과는 인연이 깊다. 현대문학 표지도 했었고, 시 한편을 주면 지금도 사진을 찾아 드린다. 평론가의 글을 볼 때도 단어선택의 탁월함이 느껴진다. 서평에서 제목이나 짧은 내용은 다 읽어본다. 직접 겪을 수 없는 걸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기에 즐기는 것 같다. 책을 자주 사는데, 당장 읽지 않더라도 재밌어 보이는 건 꼭 사서 쌓아두곤 한다. 책이 아니라도 마주하는 텍스트들을 ‘이런 제목, 이런 단어를 썼구나’ 하면서 저런 글귀로 내 작품이나 전시 제목을 하면 어떨지 싶어 기록을 다 해둔다. 항상 배운다는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다. 

- 페데리코 펠리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같은 감독들이 몇번 언급됐다. 긴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것을 이유로 사진에 영화적 시도를 입히고 싶던 적은 없는가?

영화에는 사진에 없는 깊이감이 있는 것 같다. 영화는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있다. 사진은 한 장으로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인가를 상상을 해야 한다면 영화는 스토리로 이미 그 사람이 거친 시절과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해주니까 그게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님도 맨날 술 마시면서 “구 작가 영화 하려면 데뷔시켜줄 수 있어” 하면서 농담을 하셨다. (웃음) 그런데 영화는 많은 사람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만한 능력과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감독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 실패한다고 해도 책임질 게 많고, 그 산업 속에서 너무 빨리 소모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런걸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대신 나는 사물이나 대상을 발견하고 교감하는 데 능하니, 너무 욕심 내지 말고 내 본분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한다. (웃음)

- 기술의 발달에 따른 새로운 매체나 디지털적 측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생각이 있는지?

비디오와 음악을 결합해 시도한 것들이 있다. 사실 이번에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공간의 제약으로 그러지 못했다. 비디오로 물을 표현한 것도 몇 가지 있고, 1998년에 <샘> 시리즈 직전에도 비디오로 움직이는 작업을 했었다. 당시엔 사진작가가 비디오로 작업한 게 거의 없었다. 

그래도 아직 기술이 압도하는 건 선뜻 내키지 않는다. 기술보다는 감정과 메시지가 잘 전해지는 것을 가능하면 해보려고 한다. 요즘 미디어아트가 공간을 압도하듯 굉장히 드라마틱한데, 그건 한두 사람이 참여하는게 아닌 대형 산업이기에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내 표현 방법에 적합하다면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계속 관심을 가질 것 같다. 

- 한국 사진사에서 현대사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가의 행보는 영원히 기록될 무언가다.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어떤 작가로 어떻게 기억될지는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내 욕심일 것이다. 기억하는 것은 산 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