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 한국합창음악의 개척자, 나영수 잠들다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 한국합창음악의 개척자, 나영수 잠들다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4.03.0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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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1974년 7월 18일과 19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국립합창단’ 창단공연 ‘한국합창곡발표회’가 열렸다. 1973년에 창단된 국립합창단의 첫 번째 무대였다. 국립합창단 창단의 주역은 나영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서, 우리나라 뮤지컬과 합창의 발전과 연관해서 나영수는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어디 이 두 분야겠는가. 

1970년대, 새롭게 세운 한국 합창음악의 역사 

장충동 국립극장 준공기념 대작 연극 ‘이순신’(1973)을 비롯, 개관기념 전속단체의 모든 공연에 합창지도는 나영수였다. 지난 20세기를 거쳐서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합창곡으로 불리는 곡은 모두 나영수가 지휘하는 합창을 통해서 알려졌다. 바위고개(이흥렬 곡) 고향의 노래(이수인 곡), 돌의 노래(최창권 곡), 진달래(박재열 곡)이 그렇다. 

초창기 국립합창단의 정기연주회는 대한민국 합창음악의 새로운 역사 자체였다. 나영수가 선곡한 레퍼토리의 제 1 조건은 ‘한국적인’ 작품이었다. 국립합창단이 당달구(김동진 곡), 새야새야파랑새야 (채동선 곡), 도라지(김달성 곡), 놀량 (김희조 곡)와 같은 한국의 전통토속요에 기반한 곡들을 관객과 소통하는 레퍼토리로 자주 등장시켰기에, 이후의 60여개에 이르는 합창단이 한국적인 합창곡에 더 신경을 썼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영수와 국립합창단을 통해 알려진 숨겨진 명곡들 

뮤지컬 ‘춘향전’(김희조 작곡) 중 ‘가엾어라 춘향이’와 ‘어화 세상사람들아’, 창극 ‘심청전’(김희조 작곡) 중 ‘뱃노래’, 오페라 ‘춘향전’(김동진 작곡) 중 ‘광한루’, 오페라 ‘원효대사’(장일남 작곡)의 ‘염불’은 훌륭한 명곡임에도 대한민국 음악계에서 별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곡들을 합창무대에서 소개했기에 널리 알려지게 된 거다. 그런 대표곡인 칸타타 ‘그리운 산하’(최영섭 작곡) 중 ‘그리운 금강산’(한상억 시)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운영 곡), 성모송(최병철 곡), 기도(박은회 곡)도 나영수와 국립합창단에 의해 시작되어서 지금도 불리는 대표적인 성가곡이다. 

나영수에 의해서 우리나라 합창음악의 외연이 넓혀진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일텐데, 그런 작품으로 ‘환향녀’(1989년, 이종구 대본 및 작곡)가 떠오른다. 초연 당시 ‘가극’으로 명명한 이 작품은 이색적인 오페라라 하겠으나, 합창이 중심이 되어서 작품의 맥락을 이어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이런 시도는 나영수와 같은 타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열린 시각’의 예술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영수가 이끄는 국립합창단이 참여한 '계백’(1991년, 박재삼 대본, 최창권 작곡), '들의 노래'(1995년, 이강백 대본, 이건용 작곡), '만덕할망’(2010년, 김문환 대본, 이영주 작곡) 등은 한국의 창작칸타타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2012년 2월 16일, 마에스트로 나영수와 함께하는 한국합창의 향연 ‘불후의 명곡’(세종 M시어터)은, 그에 의해서 알려진 수많은 곡 중에서 일부를 들을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나영수는 알다시피, 한국합창음악과 함께, 초창기 한국뮤지컬의 개척자로서 함게 기억되늰 인물이다. 서울대 음대 성악과(바리톤)를 졸업한 그는 일찍이 예그린에 투신해서 합창지도를 맡으면서 배우로 활약했다.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서 방자 역할은 최고였다. 마치 탈춤판의 말뚝이처럼 채찍 하나를 들고 무대를 활보하면서 불렀던 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러기에 뭐랬지”에서 그의 독특한 음성이 귀에 쟁쟁하다. 국립영화제작소의 제작한 '살짜기 옵서에"(1966년)의 일부 프로그램에서 그의 활약상이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님이 오시는지, 그의 마지막 합창지휘 

2023년 6월 1일, 국립합창단 창단 50주년 기념연주회 '창작칸타타 베스트컬렉션' (롯데콘서트) 앵콜 무대에 나영수가 등장했다. 국립합창단 및 OB단원이 함께 님이 오시는지(김규환 작곡)를 불렀다. 무대와 객석은 대한민국 합창음악을 개척한 거장 나영수에게 존경을 표했다. 국립합창단의 초대, 3대, 7대 단장겸 예술감독을 지낸 나영수는 한국합창음악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2024년 3월 2일, 국립합창단과 함께 50년을 넘긴 나영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 뮤지컬의 개척자이자 한국 합창음악의 산증인은 이제 역사의 인물이 되어버렸다. 사후의 세계가 있다면, 
먼저 간 많은 작곡가들이 지상에서 자신의 노래를 고귀하게 살려서 이어준 나영수에게 크게 감사하면 환영하지 않을까 싶다. 고 나영수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