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수퍼스타 헨델, <리날도>에서 <메시아>까지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수퍼스타 헨델, <리날도>에서 <메시아>까지
  •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4.03.2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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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18세기 사람들은 런던을 주저 없이 ‘세계의 수도’라 불렀다. 청교도 혁명의 영향으로 음악의 불모지였던 이 곳에도 오페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705년 ‘여왕의 극장’(Queen's Theater)을 필두로, 링컨즈 인 필즈, 드루리 레인, 코벤트 가든 등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었다. 국왕과 귀족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돈만 있으면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이 시대, 음악으로 이익을 얻기 원하는 사람은 영국으로 가야 한다!” 헨델은 25살 되던 1710년 단도직입적으로 런던 행을 택해서 성공을 거머쥔다. 그의 런던 데뷔작인 <리날도> 중 ‘울게 두소서’(Lascia ch'io pianga)가 영화 <파리넬리>에 나온다.  

“울게 두소서, 잔인한 내 운명! 내가 오직 자유만을 갈망한다는 것, 내 마음속 아픔을 잊게 하소서, 고통의 굴레를 벗게 하소서!” 

1차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요술 오페라’는 천둥, 번개, 불꽃놀이 뿐 아니라 진짜 새떼가 등장하는 등 대단한 장관이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파리넬리가 부르는 이 노래는 마녀에게 잡힌 십자군 대장의 딸 알미레나가 자유를 갈구하며 부르는 아리아다. 하지만 실제로 파리넬리는 헨델의 오페라에 출연한 적이 없다. 파리넬리는 1734년부터 1737년까지 3년 동안 런던에서 활약했지만 공교롭게도 헨델이 속한 ‘제2 아카데미’와 경쟁 관계에 있던 ‘귀족 오페라’ 멤버였기 때문이다. 헨델은 1730년 파리넬리를 캐스팅하려고 베네치아를 방문했지만, 만나지도 못한 채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리날도>의 성공으로 밑천을 만든 헨델은 대서양에서 노예무역을 하는 ‘남해회사’의 주식에 투자하여 10배의 차익을 남겼다. 과학자 아이작 뉴튼도 이 회사에 7천 파운드를 투자했다가 모조리 날렸다니, 헨델의 음악적 직관이 뉴튼의 치밀한 추리력보다 더 쓸모 있었던 셈이다. 헨델이 런던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위대한 재능 뿐 아니라 조지 1세의 후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독일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는 1710년 봄, 헨델을 궁정 작곡가 겸 지휘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하노버라는 답답한 시골구석에 주저앉을 생각이 별로 없었던 헨델은 겨울 휴가를 이용, 런던에 가서 오페라 <리날도>를 성공시켰고, 이 작품을 15회 지휘하느라 하노버에 늦게 돌아왔다. 선제후 게오르크는 헨델이 괘씸했지만 그의 재능을 봐서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헨델은 또 한 번 영국행을 단행했다. 잠깐 다녀온다며 선제후의 허락을 받았지만, 이번엔 아예 돌아오지도 않았다. 하인 신분인 헨델이 출세를 위해 계약 의무를 헌신짝처럼 저버린 셈이니 하노버 선제후로서는 무척 황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3년 뒤 재회하게 된다. 하노버가 아니라 런던에서였다. 1714년 영국의 앤 여왕이 죽자, 할아버지가 영국인이었던 조지 1세가 영국 왕위를 이어받게 된 것이다. 조지 1세는 독일말로 ‘게오르크’, 다름 아닌 하노버 선제후였던 것이다. 

헨델은 자기의 배신행위 때문에 양심이 불편했다. 하지만 조지 1세는 헨델을 문책하기는커녕, 오히려 많은 곡을 의뢰했다. 헨델은 왕의 노여움을 완전히 풀어 줄 기회를 모색했다. 당시 왕실에서는 뱃놀이를 자주 했는데, 헨델은 배 위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작곡하고 지휘하여 왕을 기분 좋게 해 주었다. 이게 바로 <물위의 음악>이다. 1717년 7월 17일 왕의 유람선 행렬이 템즈강을 거슬러 화이트홀에서 첼시까지 올라갔고, 그 때 이 곡이 연주됐다. 왕과 귀족, 귀부인들이 큰 바지선을 탔고, 악단이 탄 바지선이 나란히 가며 연주했다. 당시 한 일간지의 보도. “악단을 태우고 가기 위해 시티 회사의 유람선을 사용했다. 이 행사를 위해 헨델씨가 특별히 작곡한 가장 훌륭한 심포니를 50명의 악사들이 온갖 종류의 악기들을 동원, 줄곧 연주하였다. 왕은 이를 무척 좋아하셔서, 가는 길과 오는 길에 모두 세 번이나 다시 연주하도록 분부하셨다.” 조지 1세는 음악에 크게 만족하여 되풀이 연주할 것을 요청했고, 밤늦게 뱃놀이가 끝날 무렵 악사들은 모두 파김치가 됐다고 한다. 

헨델은 1726년 아예 영국으로 귀화했고, 이름마저 영어로 ‘조지 프레더릭 헨델’(George Frederick Handel)로 바꿨다. 그가 1727년 조지 2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한 <사제 자독>의 ‘대관식 찬가’는 영국 왕실의 주요 행사에서 빠지지 않고 연주되는 명곡으로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는 모두 46편의 오페라를 선보이며 영국 음악계의 수퍼스타로 활약했다. 
 
헨델은 오페라에서 더 큰 흥행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비용이 덜 드는 오라토리오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메시아>는 32곡의 헨델 오라토리오 중 최고 걸작이며, 특히 ‘할렐루야’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합창 음악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이 대목이 시작될 때 청중들이 모두 기립하는 관례가 있다.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될 때, “왕 중의 왕”이라고 노래하는 대목에서 감동한 조지2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다른 청중들도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에 생긴 관례라고 한다. 하지만, 조지2세가 공연장에 늦게 도착했고 그를 맞이하려고 청중들이 모두 일어났는데 그 때 우연히 ‘할렐루야’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헨델은 이 대작을 이 대작을 1741년 8월부터 9월까지 단 3주만에 완성했다. 이 기간 헨델은 작곡에 몰두한 나머지 무아의 경지에 빠지곤 했는데, ‘할렐루야’를 작곡할 때는 하늘이 열리며 위대한 신이 나타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메시아>는 런던에서 초연할 수 없었다. 이 성스런 작품을 대중 극장에서 공연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으로 여겨진 것이다. <메시아>는 1742년 4월 13일 더블린의 ‘닐 음악홀’(Neal's Music Hall)의 자선 음악회에서 초연되어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당시 언론은 “청중들의 기쁨과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며 “마음과 귀를 사로잡은 최고의 작품”이라고 격찬했다. 극장이 매일 초만원을 이루자 신문은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부풀린 치마를 입고 오지 말라”고 여성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헨델은 <메시아>를 32차례나 직접 지휘, 과거의 명성을 단숨에 회복했다. 이 작품은 성공회가 지배하는 영국의 국가 이념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간주됐고, 헨델은 영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연주의 수익금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 당시 한 평론가의 말이다. “이 음악은 굶주린 자를 먹였고, 헐벗은 자를 입혔다.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고아들을 키웠을까!” 그는 최고 걸작인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성공시킨 뒤 마지막 관현악곡인 <왕궁의 불꽃놀이>로 영국인들을 기쁘게 했고, 1759년 세상을 떠난 뒤 모든 영국인들의 애도 속에 웨스트민스터에 안장됐다. 

* 카스트라토(castrato) : ‘거세된 가수’란 뜻. 16~18세기 유럽에는 소년의 고운 목소리가 어른 목소리로 변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노래 잘하는 소년을 거세하는 관행이 있었다. 후두는 소년이지만 폐활량은 어른이기 때문에 소리가 힘차고 음역이 넓어서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