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믿음이 흔들리는 시대, ‘타인의 삶’으로 ‘나’를 발견하다
[공연리뷰] 믿음이 흔들리는 시대, ‘타인의 삶’으로 ‘나’를 발견하다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4.12.10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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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상황 속 예술로 회복하는 인간성
내년 1월 1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 “당신이 아무리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도, 이 비극의 동조자야.” 연극 ‘타인의 삶’에 등장하는 극중극 <공장의 안티고네>의 대사이다. 이 작품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5년 전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을 배경으로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2024년 12월 7일 LG아트센터 서울 객석에 앉은 나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안겼다. 

▲연극 <타인의 삶> 공연 사진 (제공=프로젝트그룹일다)
▲연극 <타인의 삶> 공연 사진 (제공=프로젝트그룹일다)

베를린 장벽 붕괴 전, 동독에서 벌어진 예술가들에 대한 정부의 감청과 감시를 소재로 한다. 비밀경찰 비즐러가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인기 배우 크리스타 커플을 감시하게 되면서 겪는 심리의 변화를 다룬다. 

연극은 영화의 정서를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각 인물이 처한 상황과 선택을 입체적으로 해석하며 인간의 근원적 본성을 고찰하는 데 주력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가진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에 대한 감시가 진행될수록 자신의 신념과 실제의 괴리를 갖게 되고, 급기야 자기가 충성을 바쳤던 조직에 반하는 선택을 한다. 반면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동독의 주류 예술가로, 그들은 체제에 대해 핏발선 저항도 무력한 순응도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무대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고, 예술을 향한 그들의 순수한 사랑과 열정은 비즐러의 내면에 균열을 가져오는 결정적 동인이 됐다.

▲연극 <타인의 삶> 공연 사진 (제공=프로젝트그룹일다)
▲연극 <타인의 삶> 공연 사진 (제공=프로젝트그룹일다)

연극은 비즐러의 변화에 집중하여,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향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주목했다. 또한 시대 앞에 놓인 인물들 각자의 결단을 통해, 인간의 선한 의지는 어디에서 오는지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비즐러 역을 맡은 배우 윤나무는 국가가 부여한 이념과 스스로 깨달은 신념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혼돈을 포장 없이 보여줬다. 극의 초반, 무채색의 의상처럼 경직되고 자비 없는 정보국 요원이었던 윤나무의 비즐러는 ‘타인의 삶’을 통해 브레히트의 시집과 소나타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인물로 변화했다. 그리고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에서 이탈해 고독하지만 주체적인 삶을 쟁취했다. 인물의 축적된 시간은 무대 위에서 생략됐지만, 배우의 표정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드라이만을 연기한 김준한은 명료한 딕션과 갈수록 심화되는 감정선을 표현해, 억압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과감하게 자유를 외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줬다. 최희서는 무대에서 빛나던 당찬 배우가 사랑하는 무대와 연인 그리고 삶을 모두 빼앗기는 크리스타의 비극적 서사를 강렬하게 그려냈다.

▲연극 <타인의 삶> 공연 사진 (제공=프로젝트그룹일다)
▲연극 <타인의 삶> 공연 사진 (제공=프로젝트그룹일다)

원캐스트로 출연하며 1인 다역을 맡은 조연 배우들의 연기는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김정호는 권력으로 문화예술계를 주무르는 햄프 장관과 당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연출가로서의 경력이 끊긴 예르스카라는 대척점의 두 인물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이호철은 출세에 집착하는 비즐러의 상관 그루비츠 국장과 체제 비판적인 드라이만의 친구 하우저를 서로 다른 무게감으로 관객에게 전달했다. 우도 외 다양한 역할로 무대에 오른 박성민은 무거운 내용을 다루는 공연에서 과하지 않은 감초 연기로 적절한 환기를 시켜줬다.

이 작품은 배우 손상규의 연출 데뷔작이다. 직관적이면서도 직접적이지 않은 세심한 연출이 돋보였다. 사방이 트여있는 무대는 공간의 전환이 자유롭다. 연극 무대에서 드라이만의 집, 정보국 조사실 등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무대 장치가 많지 않아 다소 허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배우들이 동선에 따라 그릴 수 있는 그림이 많다. 특히, 드라이만을 도청하는 비즐러는 분명 집 밖에 있지만 도청 내용에 호기심이 생길수록, 체제를 향한 신념보다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그들에게 동화될수록 집 안에 함께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다. 비즐러의 심리적 변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탁월한 연출이었다. 

▲연극 <타인의 삶> 공연 사진 (제공=프로젝트그룹일다)
▲연극 <타인의 삶> 공연 사진 (제공=프로젝트그룹일다)

타인의 삶을 통해 비로소 ’국가의 체제’가 아닌 ‘자신의 신념’을 발견한 그는, 드라이만을 보호함으로써 자신을 지키고자 했다. 이것은 비즐러가 이뤄낸 조용한 혁명이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동독 자살통계 보고서 대신 레닌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시나리오를 직접 작성해 거짓으로 제출했다. 레닌의 목소리를 빌려 눈물로 외치는 비즐러의 대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혁명은 말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