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 창작 오페라 '사막 위 디아스포라' 세계 초연
[이채훈의 클래식비평] 창작 오페라 '사막 위 디아스포라' 세계 초연
  • 이채훈 음악사 연구가, <모차르트 평전> 저자
  • 승인 2024.12.16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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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이 관심 가질 만한 글로벌한 주제 뜻깊어
-빈약한 드라마, 매력 부족한 음악 아쉬움 남겨
▲이채훈 음악사 연구가, <모차르트 평전> 저자, 전 MBC 음악PD
▲이채훈 음악사 연구가, <모차르트 평전> 저자, 전 MBC 음악PD

우리 창작 오페라가 국제적 이슈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12월 11일(수) 구로아트밸리예술극장, 서울오페라앙상블(예술감독 장수동)의 <사막 위 디아스포라>가 세계 초연됐다. <취화선>, <붉은 자화상> 등 우리 역사에서 발굴한 소재뿐 아니라 지구촌의 관심이 집중된 이슈를 과감하게 오페라로 제작하여 선보인 것은 대단히 의미가 크다.

이 오페라는 시리아 내전 속에서 총 대신 책을 들고 저항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아랍의 봄’ 당시 민주화가 좌절되고 조국을 떠난 700만 시리아 난민들을 비롯, 중동 지역 난민들의 비극적 삶이 오페라 무대에서 펼쳐진다. 장수동 예술감독은 프랑스의 분쟁 전문기자 델핀 미누이가 쓴 《다리야의 지하 비밀도서관》을 읽고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글로벌한 주제에 걸맞게 세계 여러 나라 출신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한국의 순이는 코로나 때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간호사로, 자기 딸이 희생되자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의 일원으로 중동 난민촌에 왔다. 일본에서 온 외과 의사 야마다가 그녀와 함께 한다. 구호 활동가 오마르는 테러로 부모를 잃은 나디아와 함께 비밀도서관을 운영한다. 악역으로는 무기와 마약으로 난민촌의 밤을 지배하는 아사드와 난민수용소 감독관 탈리아가 있다. 프랑스의 구호품 비행사 파비앵과 한국의 종군기자 경훈도 활약한다. ‘우리 얼굴을 한 한국 오페라의 세계화’를 위해 기본적인 구색을 갖춘 셈이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창작오페라 '사막의 디아스포라' 공연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정교한 슬라이드 영상을 통해 현장의 분위기를 재연한 것은 훌륭했다. 난민촌 풍경은 물론, 다양한 이미지 영상으로 현장감 넘치는 무대를 연출했다. 정주현 지휘 서울오페라앙상블 오케스트라(14명), 순이 역의 소프라노 정시영 등 성악가들은 꽤 어려운 음악을 성공적으로 연주해 냈다. 맹렬한 연습의 결과일 것이다. 원래 있어야 할 하모니카가 대신 멜로디카를 넣었다는데, 특별히 흠이 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아랍풍의 무용을 선보였는데, 오페라에 다채로운 색깔을 주고 청중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배려였겠지만, 고대 페르시아 무용과 비슷해서 현실감이 부족해 보였다. 오늘날 그 지역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과 무용으로 하든지 아예 생략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창작오페라 '사막의 디아스포라' 공연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오페라는 작곡가의 것”이라는 게 장수동 예술감독의 지론이다. <돈조반니>, <라트라비아타>, <토스카> 등 걸작 오페라를 말할 때 사람들은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를 기억할 뿐 로렌초 다폰테, 프란체스코 피아베, 주세페 자코사/루이지 일리카 등 대본작가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막 위 디아스포라>는 작곡가 오예승의 작품이다. 그는 자기 음악이 작품의 스토리 텔링에 도움이 되는지 고민했다고 밝혔지만, 스토리텔링 자체가 약했기 때문에 음악도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창작오페라 '사막의 디아스포라' 공연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경계 없는 음악을 하고 싶다”고 밝혀온 그는 중동풍, 재즈풍의 선율을 사용하는 등 자유분방한 음악을 구사했지만 극장을 나서는 청중들이 오래도록 기억할 만한 선율을 선사했는지는 의문이다. 순이의 아리아에서 등장하여 파비앵의 아리아에 다시 나타나는 ‘생명의 물’ 유도동기는 한번 들어서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작곡가 스스로 마음에 남기고 싶었다고 한 ‘생명의 물’이란 단어가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은 건 아쉽다. 오예승은 2019년 <김부장의 죽음>에서 재기발랄한 면모를 보였기 때문에 큰 기대를 모았는데, 이번에는 아쉽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음악을 들려주지 못했다.

K-팝이 세계를 열광시키는 현실을 볼 때 밀라노 라스칼라, 빈 슈타츠오퍼,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이 작품을 유럽 성악가들이 한국말로 노래하는 멋진 상상도 가능하다. 우리는 그게 아주 허황된 꿈이 아닌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청중들을 감동시킬 만한 강렬한 드라마, 그리고 인종과 국경을 너머 두루 호소할 수 있는 멋진 음악이 필요하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의 창작오페라 '사막의 디아스포라' 공연의 한 장면.(사진=서울오페라앙상블)

이 오페라가 막이 오르기 사흘 전인 12월 8일,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이 무너졌다. 구로아트밸리예술극장 로비에서는 “이 오페라 공연 소식에 독재자가 겁을 먹고 러시아로 도망쳤다”는 우스개가 오갔다. <사막 위 디아스포라>가 탁월한 작품성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다면 이 말이 단순한 우스개에 그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이 프랑스 혁명을 앞당긴 것처럼 예술이 현실을 변화시킨 역사적 선례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