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전쟁 같은 삶에 낭만을 데려온 거인, 뮤지컬 ‘시라노’
[공연리뷰] 전쟁 같은 삶에 낭만을 데려온 거인, 뮤지컬 ‘시라노’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5.01.1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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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23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 문학 작품과도 같은 아름다운 말들을 유려하게 쏟아내는 음유시인이지만, 권력과 불의 앞에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뽑는 낭만 검객. 콧대 높은 영웅 시라노가 돌아왔다.

▲뮤지컬 <시라노> 홀로, 시라노 役 고은성 (제공=RG컴퍼니, CJ ENM)
▲뮤지컬 <시라노> 홀로, 시라노 役 고은성 (제공=RG컴퍼니, CJ ENM)

뮤지컬 <시라노>는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1897)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으로, 배경은 17세기 중엽 프랑스 파리다. 이 시기 파리는 시(詩)를 쓸 줄 아는 것이 곧 ‘지혜’이자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있는 검술이 '힘'인 곳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시라노이지만, 능력보다 먼저 보이는 거대한 코 때문에 오랫동안 짝사랑한 록산에 대한 사랑을 숨긴다. 대신 그녀가 사랑하는 크리스티앙의 언어가 되어 사랑을 돕는다. 

대중 매체에서는 주로 <시라노> 속 로맨스 관계에 초점을 두지만, 뮤지컬 <시라노>는 ‘시라노’라는 인물 자체에 집중한다. 요즘 콘텐츠 소재의 주류인 화려한 장치나 자극적인 소재 대신, 뮤지컬 <시라노>는 고전 작품만이 가지는 낭만과 진심을 관객에게 최대한 아름답게 전한다. 폭압과 전쟁의 시대에 펜과 검을 무기로 세상 모든 거인들과 맞선 시라노의 삶을 좇다 보면, 어느새 그가 노래하던 달나라를 함께 볼 수 있게 된다. 

▲뮤지컬 <시라노> 거인을 데려와, 시라노 役 고은성 (제공=RG컴퍼니, CJ ENM)
▲뮤지컬 <시라노> 거인을 데려와, 시라노 役 고은성 (제공=RG컴퍼니, CJ ENM)

뻔하다고 생각될지 모르는 고전적인 서사를 풍성하게 채우는 일은 배우들의 몫이다. 특히, 시라노로는 처음 무대에 오른 고은성은 젊지만 노련한 영웅적 면모를 마음껏 보여줬다. 이는 어쩌면 배우 본인이 가진 에티튜드가 아닐까 싶다. 극장을 가득 울리는 웅장한 소리로 가스콘 부대를 이끄는 대장의 기백을 자랑하다가도, 록산에게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섬세한 순애보를 장미 한 송이와 함께 전한다. 적의 칼끝을 피하지 않는 당당함과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편지 뒤로 숨는 체념을 노래와 연기로 표현하며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다.

무대 세트는 작품 전반적인 분위기를 살려, 2막 몇 장면에 회전무대가 사용되는 것 외에는 기술력보다 고전미를 부각하는데 집중한다. 또한, 시라노가 록산을 위해 써내려간 아름다운 러브레터와도 같은 이 작품의 정서는 프랭크 와일드혼 특유의 고풍스러운 선율과 레슬리 브리커스의 시적인 대사, 김수빈 번역가의 각색으로 완성됐다. 

▲뮤지컬 <시라노> 록산의 부탁, 록산 役 김수연·시라노 役 고은성 (제공=RG컴퍼니, CJ ENM)
▲뮤지컬 <시라노> 록산의 부탁, 록산 役 김수연·시라노 役 고은성 (제공=RG컴퍼니, CJ ENM)

세 번째 시즌을 맞는 올해, <시라노>는 넘버 추가ㆍ교체, 스토리라인 정비 등으로 이전보다 훨씬 친절해졌다. 다소 투박했던 초연에 비하면 꽤나 다듬어진 모양새를 갖춰 만족하는 관객도 있겠지만, 시라노만의 매력이 줄어든 것 같아 아쉬움도 남는다. 새로운 오프닝 곡으로 선택된 ‘연극을 시작해’는 시대적 배경이 되는 프랑스-스페인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이 느꼈던 위태로움과 불안감을 부각시켰으나, 연극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했던 낭만 검객 시라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이전 버전과 가장 큰 차이를 보였다.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시라노>와 같은 작품은 귀하다. 백 명이든 천 명이든 거인과는 거침없이 맞서 싸우지만, 평생을 사랑한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 물러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시라노’의 이야기가 영웅담이 아닌 일상이 되길 우리는 언제나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