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헨델에게 의문의 1패을 안긴 <거지 오페라>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 헨델에게 의문의 1패을 안긴 <거지 오페라>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4.04.1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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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채훈 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 전문기자,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이러한 헨델이 의문의 1패를 당한 적이 있다. 바로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1728)였다. 헨델의 오페라가 귀족 취향인데 반해, 존 게이는 “거지도 즐길 수 있는 오페라”를 표방하며 헨델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존 게이(1685~1732)는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의 친구로, 당시 영국 지배층과 판사들의 부정 비리를 고발하는 게 일이었다. 그는 “상류층의 도덕성은 형무소에 있는 죄수들과 다를 바 없으며, 죄수들 이야기만으로도 좋은 연극이나 오페라가 가능하다”는 스위프트의 말에 솔깃하여 <거지 오페라>를 썼다. 18세기 런던 가난뱅이들의 삶을 익살스레 묘사한 이 작품은 대사가 영어로 돼 있고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의 전통 선율을 가져다 썼고 정부, 귀족 사회, 결혼 제도를 풍자하는 내용으로 관객들을 유쾌하게 해 주었다. 밑바닥 인생들의 삶이나 점잔빼는 지배층의 삶이나 본질은 똑같다고 얘기했고, 고상한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평범한 노래로 구성된 작품이 사회를 더 적나라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이 작품은 휘발성이 높을 뿐 아니라 정치 풍자가 어찌나 신랄했던지, 속편인 <폴리>가 당국의 명령으로 공연이 금지될 정도였다.  

무대는 런던 근교의 뉴게이트 감옥이다. 거지도 오페라에 출연할 자격이 있다는 선언과 함께 막이 오른다. 피첨은 겉으로는 도둑 잡는 게 일이지만 실제로는 장물을 팔아먹는 이중인격자다. 딸 폴리가 살인청부업자 맥히스와 결혼했다는 걸 알게 된 피첨은 그를 현상 수배한다. 맥히스는 도피 중에 친구인 매춘부들과 어울리는데, 그 중 한 명이 돈에 눈이 멀어서 배신하는 바람에 체포된다. 뉴게이트 감옥에 끌려온 그는 간수 로키트의 딸 루시를 임신시키고 결혼을 약속한다. 폴리가 도착하여 자기가 맥히스의 아내라고 밝히자 두 여성은 격투를 벌인다. 루시는 맥히스가 한 번 더 피신하도록 도와준다. 그녀는 폴리를 독살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맥히스는 은신처가 노출되어 또 체포된다. 그가 뉴게이트에 수감되자 폴리와 루시는 아버지에게 맥히스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는 결국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거지가 나타나 “오페라는 해피엔딩이어야 한다”고 주장해 준 덕분에 형을 면제받는다. 다시 살 수 있게 된 맥히스는 폴리와 매춘부들에게 둘러싸여 기쁨을 나눈다. 

새로운 시민 계층의 요구에 부응한 <거지 오페라>는 1728년 1월 초연된 후 62회나 공연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18세기 최고의 흥행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헨델의 오페라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헨델을 대놓고 비꼬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헨델의 <아드메토> 공연을 앞두고 주역을 맡으려는 두 소프라노 사이의 경쟁이 가열됐다. 헨델은 아주 ‘공정하게’, 연주 시간이 똑같은 아리아를 한곡씩 써 줘서 두 사람을 달래 주었는데 두 여자는 결국 무대 위에서 머리를 잡아 뜯으며 몸싸움을 벌였고, 청중들의 야유와 고함 속에 막이 내렸다. <거지 오페라>는 맥히스란 남자를 놓고 폴리와 루시라는 두 여자가 뒹굴면서 싸우는 장면을 넣어서 헨델 오페라의 불미스런 해프닝을 풍자했다. <거지 오페라>를 만든 사람은 존 게이였고, 공연을 이끈 극장 감독은 존 리치였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게이는 리치(rich)해졌고, 리치는 게이(gay)해졌다”는 말까지 유행했다. 

헨델이 작곡한 이탈리아 오페라는 글루크, 모차르트, 로시니, 베르디로 이어지는 오페라 역사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도 반짝 화제가 됐다가 사라지는 값싼 유행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등 18세기 독일 징슈필은 물론 19세기 파리와 빈의 오페레타에 영향을 주었고, 초연 200년 만인 1928년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쿠르트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로 다시 태어났고, 결국 20세기 런던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효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