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국립현대무용단 〈정글〉, 무용수 개성 충만한 기량· 무대미술· 음악 등 고품격 연출의 수작
[발행인 칼럼]국립현대무용단 〈정글〉, 무용수 개성 충만한 기량· 무대미술· 음악 등 고품격 연출의 수작
  • 이은영 기자
  • 승인 2024.04.18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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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서치 인잇의 성공 방증. 무용수들 자유로운 감정과 감각 확장성 이끌어 내 
-현대무용의 새로운 전범 보여, '세계적 작품' 평가 받을 것 기대

국립현대무용단 김성용 예술감독이 지난 11일~1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올린 <정글>은 무용수들의 자존과 개성이 충만히 끌어올려진 수작이었다. 지난 해 초연에 이어 올해 재연되면서 더 치밀해진 연출과 무용수들의 뛰어난 기량, 조명과 무대미술, 음악, 각자의 개성을 살린 의상으로 작품 전체의 품격을 높였다.

작품은 정글과 같은 치열한 우리 삶에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여정을 떠나며 ‘존재의 가치’를 되돌아 보고, '함께 가는 여정'을 정교한 춤언어로 보여준다.

▲국립현대무용단 김성용 예술감독이 지난 11일~1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올린 〈정글〉의 한 장면. (사진=국립현대무용단)
▲국립현대무용단 김성용 예술감독이 지난 11일~1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올린 〈정글〉의 한 장면. (사진=국립현대무용단_황인모)

막이 오르면 무대 전면 천정의 강렬한 빛이 다가온다. 비정형의 직사각형의 그물이 촘촘히 엮인 그 빛은 무대 중앙으로는 원뿔형의 은은한 스포트를 주고 있다. 이 조명은 유재헌 무대감독의 작품으로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의 ‘아부다비 루브르’ 천장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유 감독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까지 더해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오는 듯한 환한 빛의 조명은 조형성이 돋보인다.

17명의 무용수들은 천천히 무대로 걸어나오며 빛이 없는 어두운 무대 가장 자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순환한다. 몇 바퀴를 돌았을까, 어느 순간 한 무용수가 조명 한 가운데로 자신의 몸을 던져 넣는다. 하나 둘씩 무대의 중앙으로 들어오지만 여전히 각각의 독립된 객체로 움직인다.

무대 중앙을 비추던 조명은 점점 확장돼 더 넓은 공간을 비춘다. 비로소 각 무용수들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음악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이들은 10분여를 전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몰입한다. 이렇게 개인에서 ‘우리’로의 관계맺기 서사가 시작된다.

▲국립현대무용단 김성용 예술감독이 지난 11일~1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올린 〈정글〉의 한 장면. (사진=국립현대무용단_황인모)

타인과의 관계 맺기는 쉽지않다. 무용수들은 둘, 혹은 셋, 대여섯으로 그룹을 형성하며 군무를 선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서로간의 거리를 두며 자신의 내면의 욕망과 갈등을 정리하지 못한 채 심리적 평행선을 유지한다.

음악의 사운드는 더블베이스의 낮고 굵은 음률로 긴장감을 극대화 하기도 하고 자연의 거센 비바람과,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잔잔히 물결치는 넓은 호수의 평온한 물소리로 긴장과 이완을 교차한다. 인공과 자연의 결합이 이들의 연대를 위한 적절한 장치를 꾀했다.  

여전히 서로에 대한 경계의 끈은 늦춰지지 않고, 바로 곁에서 손을 뻗어도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다. 예민하게 주변을 경계하는 자아 속 두려움이 객석에까지 전해져 온다. 서서히 서로에 대한 신뢰가 구축돼 가는 것일까? ‘홀로’ 움직임에서 ‘상호’관계의 확장으로 무용수들의 거리는 점점 좁혀진다. 조심스레 경계를 푸는 듯 간헐적 터치도 이뤄진다.  

▲국립현대무용단 김성용 예술감독이 지난 11일~1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올린 〈정글〉의 한 장면. (사진=국립현대무용단_황인모)

공연은 정점으로 치달으며 마침내 남녀 한 커플이 손을 잡고 서로를 견인하는 긴 접촉의 시간이 도래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남자 무용수는 바닥에 쓰러지면서 둘은 결별한다. 둘 사이의 간극은 좁힐 수 없었던 걸까? 상대를 잃은 상실감을 여성 무용수는 솔로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이들을 제외한 무용수들은 무리를 이뤄 백스테이지를 향해 무심한 듯 뒤돌아 서있다. 어느 순간 여성 솔로는 그들에게 느릿하게 다가가 중앙의 여성 뒤로 스며든다. 역설적으로 집단과 조직, 군중 속의  하나로 돌아간다.

복잡다단한 현 시대에 개인들은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은둔하거나 고립을 선택하기도 한다. 주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지만, 빽빽한 정글과 같은 세상에서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며 점점 자기방어 기제를 강화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친구, 가족, 동료들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며 자신들이 꿈꾸는 세상을 향해 걸어간다. 정형화된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색깔을 가진 혼자이거나 둘이거나 여럿일 수도 있다. 결국, 대다수는 사회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들 속 하나로 살아간다는 의미일까?

▲국립현대무용단 김성용 예술감독이 지난 11일~1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올린 〈정글〉의 한 장면. (사진=국립현대무용단_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김성용 예술감독이 지난 11일~1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올린 〈정글〉의 한 장면. (사진=국립현대무용단_황인모)

이번 작품은 특별히 주역을 드러나게 내세우지 않은 점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모든 무용수들이 주역이었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모두 주인공인 것처럼.

특히 무용수들의 몸의 확장성은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극대화한 몸의 확장은 매우 유연하며, 엷은 떨림까지 섬세하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춤언어로 구현해 낸다. 온전히 자신을 인식해 나가며 관객들을 흡인했다. 

이는 김성용 감독이 지난해부터 "나는,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만든다'라는 명제로 본격적으로 실행해온 ‘리서치의 흐름: 프로세스 인잇'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무용수들이 다양한 감정에서 느끼는 몸의 표현을 획일화시키지 않고, 무용수 스스로 깊은 사유를 통해 감각을 깨우고, 에너지를 발산하게 한 결과물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즉, 무용수들은 스스로를 믿고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춤에 대한 자신감을 넘어 높은 자존감의 아우라까지 뿜어져 나왔다.

 <정글>은 오는 7월 23~24일 2024 파리 올림픽을 기념해 파리 13구 극장에서 프랑스 현지 관객 앞에 선보이게 된다. 프랑스 공연이 예정돼 있다니 지난 해 6월 LG아트센터에서 <백조의 호수>를 올렸던 프랑스 현대발레 거장인 프렐 조카쥬 예술감독이 떠올랐다. 그는 기존의 양식화된 틀을 깬 춤으로 “독일 추상 표현주의와 머스 커닝햄의 단순함과 명료함, 뉴욕 나이트클럽 ‘스튜디오 54’의 혼합”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국립현대무용단 김성용 예술감독이 지난 11일~1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올린 〈정글〉의 한 장면. (사진=국립현대무용단_황인모)

이번 김성용의 <정글>은 무용수들의 자율성을 기반한 정교하고 탁월한 연출로 현대무용의 새로운 전범을 보였다. 화려한 군무나 독무가 없더라도 명상과도 같은 정적인 움직임들만으로 춤의 깊이가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결코 조카쥬의 안무에 뒤지지 않는, 한국 현대무용의 위상을 드높일 세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끝으로 17명의 무용수들과 참여한 모든 분들께 아낌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