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Interview] 차지량 작가 “떠나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
[Artist Interview] 차지량 작가 “떠나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12.30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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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독일 등 7년에 걸친 레지던시 생활…’부유해온 삶’
낭떠러지에서 죽기 전 추게된 춤, 이후 작업서 운동성으로 발현
종양 수술 이후 ‘또 다른 나’와 같은 사람들 찾아다녀…함께 공연도
“소리는 자기 자신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감각적 파장이자 지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던 시기…부조리한 현실과 투쟁하고자
제도비판보다는 여러 환경 안에서 소실되는 개인 에너지에 집중
“역사 안에서 해결되지 못했던 것들, 어떠한 조각으로 남아있다”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지난 여름을 뜨겁게 달군 부산 비엔날레,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전시가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에 무지개가 있는 것처럼’. 부유하듯 삶을 여행하며 떠남을 기록해온 작가, 차지량의 전시다. 

몽환적인 색감과 사운드로 둘러싸인 전시 공간에는 젊은 예술가가 그간 떠나오며 남긴 기록들이 쌓여있다. ‘ㄷ자’ 형태를 띤 공간은 바깥 쪽 가벽에 작가의 일기를 전시해 작가의 시간을 따라가며 그의 삶을 추적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관객은 어느덧 작가가 표류하던 기억과 기록 사이, 꿈과 깸 사이를 유영한다. 그 사이에서 관객에게 닿는 것은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다. 

▲차지량, 보이는 모든 것에 무지개가 있는 것처럼, 2024
▲차지량, 보이는 모든 것에 무지개가 있는 것처럼, 2024

전시가 건내는 이야기는 작가의 굴곡진 삶에서 비롯된다. 2012년, 한국을 떠나면서 작가는 긴 여정 끝에 죽음을 맞이하고자 했다. 그렇게 마추픽추에 다다른 후, 낭떠러지에 선 후 작가는 돌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에게 새겨진 울분이 어떠한 운동성을 가지고 다른 에너지로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때의 경험은 후에 부산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사운드 작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17년에는 머리에 종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2021년 수술을 받기 전까지 스스로와의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다. 벼랑 끝에서 춤을 춰야만 했던 그의 삶은 지난하다면 지난했지, 순탄치는 않은 서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차지량 작가 (사진=A WORK BOOK)
▲차지량 작가 (사진=A WORK BOOK)

젊은 예술가였던 차지량은 투쟁해왔다. 부조리한 구조나 현실을 참지 못했고, 예술가의 방식으로 부딪히고자 했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에너지가 넘쳤던 때”이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이어진 <한국 난민> 시리즈에는 실제 국회의원이 등장, 이들과 협상하는 장면을 담았고, 2009년에는 아시아프(ASYAAF) 행사의 작가 대우 방식에 부조리함을 느끼고 이에 맞서는 작업을 선보였다. 이 때 이러한 시도가 현실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느꼈던 좌절과 무력감은 어떠한 파편으로 남아 때로는 작품의 형태를 빌려 아직까지 머무르고 있다.

전시, 공연 등 개인과 시스템 사이의 미디어를 활용한 참여 프로젝트를 이어온 차지량의 작업에서 중요한 화두는 ‘이동’이다. 작가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부유하고 떠도는 삶을 살아왔다. 2012년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를 시작으로 2014년 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 2015년 경기창작센터, 2016년 캐나다 몬트리올의 Darling Fonderie, 독일 베를린의 ZK/U 등 7년에 걸친 레지던시 생활을 했다. 

▲부산비엔날레에서 전시된 차지량 작가의 일기 중 하나.
▲부산비엔날레에서 전시된 차지량 작가의 일기 중 2023년 12월 9일의 기록.

베를린에 머무를 때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 잠들어 있는 시간이 잦았다. 어느 날에도 어김없이 지붕 위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불현듯 떠나왔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체를 보기 위해 많은 것들을 지나쳤고, 부유하는 시선처럼 그것들을 바라본 채 떠나왔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7년간 축적된 작업에는 ‘떠나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2020년에는 3개월 간 인구 소멸 지역의 빈집에서 거주하는 프로그램에 지원, 내세에서 농촌의 풍경을 렌즈에 담았다.

사십 대에 접어든 이후 그는 떠나기보다는 머무르며 소통하고 있다. 결혼에 회의적이었던 젊은 예술가는 영혼의 온도가 맞는 이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들의 신혼집은 마찬가지로 비슷한 온도를 가진 젊은 예술가들이 나누는 온기로 채워지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즉흥 연주 모임을 열다 보니, 거실에 커다란 피아노가 자리한 집 한구석에는 누군가가 두고간 악기들도 한 두 개씩 놓이게 됐다.

지난 12일, 홍제동 고즈넉한 골목 사이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차지량 작가를 만났다. 나지막한 그의 음성 사이로 아내와 함께 작업한 사운드 작업의 고요한 울림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소리들은 마치 떠나버린 누군가가 남겨둔 피아노, 머무르던 누군가가 두고 간 더블 베이스의 서사와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ㄷ'자 형태의 독특한 전시 공간.
▲'ㄷ'자 형태의 독특한 전시 공간.

- 올해 부산비엔날레에서 접한 작업이 인상 깊었다. 마치 작가의 이야기로 채워진 섬에서 표류하는 듯 했다. ㄷ자 형태의 공간 구성도 독특했다. 좁다란 통로에서 작가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공간 또한 내밀하게 느껴져서인지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가 좀 더 와닿았다. 작업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를 듣고 싶다.

작업의 계기는 제목에 있다. ‘보이는 모든 것에 무지개가 있는 것처럼’. 일련의 경험들 이후에 다짐이 되는 문장이라 제목으로 가져왔다. 지난 전시가 하나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전시는 아니다.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작가라는 생각, 하나의 작품을 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전체론적인 방식을 많이 떠올린다. 

여러가지 시간의 조각들을 조형적으로 배열하고, 그렇게 모인 조각들이 운동성을 가지게 했다.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문장을 찾았다. 코로나 시국을 지나 고여있는 마음과 의지들이 어떤 방식으로 운동성을 가질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떠올리며 전시를 꾸렸다.

전시 공간의 중앙에서 흘러나오던 소리는 2020년, 가장 침잠하던 때 기록한 사운드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2012년 한국을 떠나면서, 그 여정 끝에 어딘가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이었다. 마추픽추에 이르러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 직전, 어떠한 충동이 들어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2020년에도 병을 치료하기 직전 모든 것을 다 포기하려고 했던 때가 있는데, 어떤 사운드를 기록하고 그 파형을 보는데 파도 위에서 서핑을 하는 이미지가 그려졌다. 가장 침잠되어 있던 시기, 어떠한 충동이 운동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증표처럼 남는 이미지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과 다른 작업과도 전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았던 이유는 사람을 만나는 작업을 꽤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내가 먼저 나를 열고 포용해야 했다. 그러한 방식에 가까운, 감싸 안는 글들이었으면 했다. 

- 작업이 기록과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다. 이야기의 중요성을 믿는 듯 하다. 작품에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매일 어떤 단상들이 떠오르다 보면 그게 이미지라도 글로 메모하는 경우가 많다. 입력 단계랄까. 글을 쓰고 있지만 글에 머물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글은 어떻다’ 혹은 ‘글은 무엇이다’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나 자신을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2021년 6월 17일의 기록.

- 사운드, 영상, 퍼포먼스 작업을 주로 해왔다. 시각적 요소 뿐만 아니라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내 주파수에 맞게 발생시키고 흘려보내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지금까지 제가 했던 예술은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도 밝힌 바 있다. 작가에게 소리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하다.

본인이 내는 소리를 편안하게 느끼면서 발화해본 적이 있는가. 목으로 나오는 소리든, 포즈를 취하든, 어떤 시선, 온도, 밝기에 있든 자기 자신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감각적 파장이나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신자가 나의 말에 공명하듯 ‘음’ 하는 소리를 내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게 꼭 목소리일 필요도 없다. 서로가 안정적으로 공유되는 자리에서는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는데, 안정감을 주는 소리는 이를 위한 한 발자국이 아닐까. 

- 지금 이 공간에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은 꼭 명상 음악 같다.

그러한 상태에서 연주한 음악이니 그럴 것 같다. 작년 10월 즉흥 연주 모임에서 만들게 된 음악이다. 

- 최근에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작업을 진행했다. 어떠한 작업이었나. 

도시의 유휴 공간을 예술가들이 점유해 사용하거나 국・공립 기관에서 조건 없이 예술가들에게 공간을 내어주던 시절이 저물고 있음을 목격했다. 그 이후의 것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의문을 던지며 기관과 예술가에게 서로의 자양분이 되어주던 그러한 자원들이 사라지고 줄어드는 모습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마지막 잎새’가 우연찮게 떠올라 동명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보관된 기록을 발화해 참여자와 공유하는 참여형 퍼포먼스다. 오픈 스튜디오에서 몇몇 사람들을 초대해 낭독 퍼포먼스, 토크, 라이브 형식의 작품을 몇 개 기록했다. 

그게 이후의 작업으로도 이어졌다. 동명의 소설 작업이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제작 중인 도록이 있는데, 거기 실릴 소설을 한 편 썼다. 세상에 있는 미술관들이 전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미술관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 미술이 생태 환경을 이야기하는 추세지만, 그럼에도 다소 인간중심적인 방식이 많이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먼 미래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미술관이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담론을 형성하다가 결국 인류가 사라졌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부산현대미술관은 을숙도 생태공원이라는 자연적인 공간에 지어진 미술관인데, 덩쿨 식물이 건축물의 표면을 마치 파사드 작업처럼 감싸고 있다. 미술관은 문을 닫고, 남아있던 식물들이 성장해서 미술관 내부에 들어오는 등 그런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1월에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 ‘난지 엑세스’ 프리미어를 통해 공개된 영상 ‘리빙룸 풍경이 소리가 되는 집’에서 “머리 종양 제거 후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수술 이후의 정서적 변화가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는 작업으로 이어지게 된건가.

2017년에 머리에 종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2021년에는 종양제거 수술을 했다. 그 다음에 초점을 맞춘 것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 상태에 맞는. 이런 의지와 마음을 갖게 된 다음에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시간이 있었다. 

수술 이후부터는 특정 상태의 사람들과 함께 내가 나만이 아닌 것을 느끼는 시간을 겪고 난 이후 또 다른 나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지난 11월에 선보인 전시와 동명의 공연, ‘마테리델리아’도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한 공연이었다. 

▲'보이는 모든 것에 무지개가 있는 것처럼' 퍼포먼스
▲'보이는 모든 것에 무지개가 있는 것처럼' 퍼포먼스

- 어떤 사람들인지 자세히 듣고 싶다.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나도 바깥에 많이 노출되는 작가는 아니었는데, 마찬가지로 내재적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꿈과 깸 사이의 공간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야하나. 현실과 이상의 사이, 자신만의 세계일 수도 있는 지점들을 찾아가는 사람들, 모든 것들의 양쪽을 감지하지만 그곳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 요즘 소리 발생의 시간에 들어가 거기서 연결되는 여러가지 시청각적 장소를 발견하고자 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중 하나를 2022년 4월에 만나 10월에 결혼을 했다. 이 집도 작년 3월에 얻은 신혼집이다. 구옥이다 보니 방은 작고 거실이 넓어서 사람들을 자주 초대하고 시간을 나눴다. 최근 난지창작스튜디오에서의 작업도 그렇게 모임을 가지는 영상을 집 밖에서 찍어 보고 싶어서 원형 전시실에서 비슷하게 세팅해 소개하게 된 것이다. 

- 거실에 아내가 쓴 글로 이루어진 작업이 있던데, 둘의 관계가 특별해 보인다. 예술적 온도가 통하는 것 같아 보인달까.

결혼생활이나 제도적인 것에 동의하지 않았던 내가 결혼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어떠한 합일감을 많이 느꼈고, 만난지 얼마 안 되어 ‘이 사람과 결혼하겠구나’ 싶었다. 

아내는 사진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딱히 매체에 구애 받지 않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노래 소리도 아내의 목소리다. 아내와 작업을 많이 하고 있다. 

▲편지의 형태를 한 차지량 작가 아내의 작업.
▲편지의 형태를 한 차지량 작가 아내의 작업. 피아노 위에 놓여있다.

-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다. 내세에서 머물던 경험은 특히 작업에 영향을 많이 미친 것 같다. 다사다난한 일을 겪은 듯 한데,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경험이나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

2020년, 당시 대부분의 문화 행사가 취소되면서 코로나 사태로 작업을 포기하는 동료들도 있었고, 밀집된 공간이 주는 불편함까지 더해져 건강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고립될 수 있는 공간을 찾았고, 마침 3개월동안 인구 소멸 지역의 빈 집에서 거주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비어있게 된 집에서 3개월 머물며 잘 쓰지 않는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끼우고 시간을 기록했다.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던 것들이 여전히 많았는데 그런 부분들에 있어 많은 변화가 생겼다. 시골에서 접하는 자연 풍경이나 시스템 등이 도시와는 다르다 보니 많은 것들을 새로이 받아들이게 됐고, 그게 너무 감사했던 시간이다. 

-  캐나다 레지던시 이후, 2018년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베를린 레지던시를 다녀온 후 <캔 파운데이션 아트 네트워크 프로젝트_차지량 베를린 ZK/U 레지던시 보고전 : Good morning : Good night>을 열었다. 베를린에서 작업 내용은 어떤 것이며, 관객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2011년 <일시적 기업> 작업 이후, 2012년에는 국가시스템, 기업문화, 주거문화 등에 관련된 작업을 하면서 많은 걸 제안하고 발생시키고자 했다. 의지가 어떤 부분에서는 선명했지만, 체념하게 되는 게 많았다. 실질적인 상황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 역시 그랬던 것 같다. 그 때부터 떠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작업을 시작했다. 2012년 부산비엔날레 특별전 《Outside of Garden》에서 선보인 작업도 떠남을 선언하는 작업이었다. 여행이 아니라 다른 시스템에서 살아보면서 다른 환경, 조건 등에 부딪혀나가는 작업을 이어갔다.

레지던시를 활용한 것도 그 일환이다. 그런 시간이 7년 정도 지속됐다. 베를린에서는 지붕 위에 올라가 잠들어있는 시간이 있었다. 지금까지 떠나면서 전체를 보기 위해 많은 것을 지나쳐왔고, 어떤 걸 견디지 못하고 부유하듯 떠나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떠나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라는 문장을 떠올렸다. 그 문장을 떠올린 이후, 그동안 쌓인 비디오 클립을 전부 순서대로 나열했다. 어디인지 모를 듯한 상태가 됐을 때, 장면도 공간도 아닌 곳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장면들이 휴대폰으로 기록된 것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집 없이 떠돌아다니며 짐을 줄여야했는데, 베를린에서는 그렇게 축소시켜온 것들을 펼쳐 놓는 작업을 했다. 

내 작업을 본 관객들은 “자신의 상태와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고 이야기하고는 한다. 이 시점부터 내부로 파고드는 화법에 더욱 골몰했던 것 같다.

▲제 19회 송은미술대상전시 전경.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 설치 작업.
▲제 19회 송은미술대상전시 전경.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 설치 작업.

- 권력구조와 제도비판에 관심을 두고, 학연과 지연을 중시하는 미술계의 풍토를 비판, 관련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이러한 구조에 환멸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었나.

지금 보면 사회나 구조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기보다는 개인의 반응 정도였던 것 같다. 거시적으로 이야기한 건 <한국 난민> 시리즈에서 국회의원과 협상하는 연출, 딱 한 번이다. 그 작업을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무언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임했던 작업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방식은 건강하지 못한 방식이라 생각한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였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한 작업이 나온 것 같다. 내 작업이 제도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환경 안에서 소실되는 개인 에너지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

- 2009년, 조선일보 주최 아시아대학생 아트페어인 아시아프에서 ‘보수언론사 수습기자와 미대생이 등장하는 PD수첩’ 작업을 제작했다. 보다보니 백남준의 클린턴 앞에서의 ‘바지퍼포먼스’가 떠올랐다. 조선일보측과 마찰도 있었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었을 것 같다. 참여 학생들과 관람객 등의 다양한 반응을 담았다. 기획의도와 당시에 있었던 해프닝을 듣고 싶다.

전반적으로 그런 작업을 많이 하던 때다. 내 안의 에너지도 많았다. 한국 사회 안에서 다소 순진했던 부분이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학습을 통해 사회의 위계와 구조를 잘 이해하게 됐지만, 당시는 이를 인식하지 못했고, 무언가가 함부로 이루어지는 현상들을 잘 참지 못하던 때였다. 각각의 기능자와 역할자가 있는데 왜 우리가 1:1로 대응할 수 있는 방식은 없는지 납득할 수 없던 시절이다. 

아시아프는 아시아 청소년, 젊은 작가들을 위해 만들어진 행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들의 방식 그대로를 호출해서 접근할 수 있는 작업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경제적인 압박으로 인해 특정 행위를 해야만 하는 사람과 그런 곳에서조차 배제된 인물 등으로 층위를 나눴는데, 그런 것들이 모두 존재하는 것이 우리 세계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어떠한 방식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동의하지 않느냐, 혹은 동의하느냐의 차이고, 나는 동의하지 않았을 뿐이다. 

주력해서 관심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님에도 어떤 현상이 벌어지니 이런 식으로 표출된 것 같다. 내가 일종의 개인 미디어로서 무언가를 했던 때인데, 지금 와서 보면 어쩌면 그 시절의 나는 유튜버였나 하는 생각도 든다. (웃음) 

▲차지량, 보수언론사 수습기자와 미대생이 등장하는 PD수첩, 2009
▲차지량, 보수언론사 수습기자와 미대생이 등장하는 PD수첩, 2009

- <한국 난민>시리즈는 미래를 파국으로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 <멈출 수 있는 미래의 환영>은 미래에서 온 가상의 난민과 현재의 정치인이 등장해 삶에 대한 협상을 시도했다. “이것은 예술이 현재의 시스템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도전이자 실험이었다”고 작가 노트에서 밝혔는데,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려 달라.

<한국 난민> 시리즈 작업을 했던 2009부터 2015년은 마찬가지로 에너지가 많았던 때다. 무턱대고 국회의원들을 찾아가 가상 협상을 진행하는 컨텐츠를 제작 중이니 출연해달라고  부탁해서 배에 태웠다. 예술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에 대한 이상적 그림을 그리던 때다. 세상을 바꾸는 작업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월호 사건 이후의 국가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 등 많은 것들을 작업에 담아 폭발 시키고 싶었다. 이 에너지들이 실제 삶으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한국 난민>시리즈 역시 실제로 협상이 잘 되지 않아 한강에 뛰어드는 엔딩으로 끝난다. 무력감을 느꼈다.

근미래로 설정한 2024년이 되었는데 한강 작가의 수상도 상징적으로 다가왔고, 어떻게 보면 지금의 사건들도 역사 안에서 해결되지 못했던 것들이 쌓여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완벽하게 정화되거나 해결되는 것 없이 시간이 쌓이면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사회 구조가 낳는 개인의 불안 요소 등 아직 정화돼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고 느낀다. 

이번 부산비엔날레 전시에서 벽의 시작과 끝에 배치했던 조각이 있다. <한국 난민> 시리즈에서 배경으로 존재하던 파도 영상에서 한 부분을 잘라 떼어온 것이다. 무언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 느껴져서, 인쇄해서 색도 입혀 보고, 시간이 지나 변화하도록 가만히 둬 보기도 했다. <한국 난민> 시리즈에서 마지막에 뛰어들었던 한강의 표면이 어떠한 조각으로 머물고 있는 느낌이다.

▲'불완전한 시공으로 사라진 개인: 한국 난민 캠프' 트레일러 중
▲'불완전한 시공으로 사라진 개인: 한국 난민 캠프' 트레일러 중

- 과거 현대미술을 소재로 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독특한 행보를 보이며 화제가 되었는데, 후일담을 듣고 싶다.

2011년에 한국을 떠나고 2013년에 잠깐 들어왔을 때 해당 프로그램 관련 소식을 접하게 됐다. 폭탄이 아직도 마음에 있을 때였기 때문에, 작가를 소비하는 이곳에 가서 ‘폭탄 터뜨리는 작업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불공정 계약도 존재했고, 작가를 함부로 다뤄 컨텐츠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지금은 제약이나 관계 등에서 개인의 상태를 점검하는 등 기초적인 제반이 다져진 시점이나, 그 때까지만 해도 많은 것들이 엉망이었다. 그런 부분들을 터뜨리고자 참가했다.

- 목적은 달성이 됐나.

그랬던 것 같다. 유명세를 얻기도 했고, 많은 시선이 모이면 어떤 일이 이뤄지는지 알기도 했다. 작업으로서 무언가를 유효하게 만들어내는게, 누군가에게는 무언가가 유실된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수가 그 쇼의 희생양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앞으로의 목표나, 작업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요즘 아무것도 집중하기 힘든 시기긴 한데, 1월까지는 좀 쉴 계획이었다. 내년에는 공연을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안정적인 공간을 연출해 관객들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내년 공연을 하며 다음 프로젝트를 막연하게 키워드로 떠올리는 건 있는데 쉬어가면서 정리해나가려고 한다.

-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음악 좋아하는 미술 아저씨 정도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