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因緣)이라며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늘에서 좁쌀 한 개가 바람으로 날려서 땅에 떨어지는데, 하필 땅에 거꾸로 꽂혀 있던 바늘 끝에 좁쌀 가운데가 꽂히는 걸 우연하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연인 사이의 만남과 사랑을 그들의 인연으로 비유하고 특별한 것으로 묘사하여 인연의 희귀성과 놀라운 연결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소설 속 이야기도 있다.
옷깃은 가슴과 가슴 사이 즉 쇄골 사이로 옷깃을 스치려면 꼭 껴안아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몸으로 끌어안는 것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절대 인연이 아니다. 진짜 인연은 내가 마음을 주고 상대를 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안아줄 만한 사람이 인생에서 몇 명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며칠 전 제주에서 감귤 택배가 도착해 확인하니, 시절 인연으로 인생 3막의 여정을 걷고 있는 ‘문화 대통령’, ‘문화계의 영원한 마당발’, ‘출판계 대부’ ‘축사의 달인’ 등 수많은 별칭의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이 보낸 것이었다.
택배 상자를 뜯으니 탐스런 감귤과 함께 흰 봉투가 보였다. 그 속엔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직 사임에 즈음하여’란 편지글이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5년간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지난 시간 함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는데 힘을 실어 준데 감사의 말씀과 앞으로도 국민신탁 운동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당부한다는 내용과 좋은 글귀를 소개했다.
곧바로 전화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편지 속의 내용을 여쭈게 되었다. 그는 문화유산국민신탁 설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2007년 신탁 출범에 큰 역할을 했고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계속 자리를 지켜왔다는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며 “설립위원장으로 참여해 회원이 300∼400명 되던 때부터 오늘날 1만 7천300명에 이르는 순간까지 왔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좋은 인연이란 움켜쥔 인연보다 나누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각박한 인연보다 넉넉한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기다리는 인연보다 찾아가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의심하는 인연보다 믿어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해가되는 인연보다 복이 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짐이 되는 인연보다 힘이 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는 80중반 인생 경험을 통한 그의 교훈적 글귀에 새삼 ‘시절인연’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다.그는 젊은 시절엔 불모지나 다름없던 출판계에 뛰어들어 사회에 꼭 필요한 책들을 펴내며 한국인의 지성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책으로 얻은 지식은 영원하고 디지털에 비할 수 없다”는 철학이 지금까지 책과 함께 해온 한국 출판문화의 산 증인으로 그 역사를 말해준다.
또한 가깝게 지냈던 이어령 선생이 1989년 초대 문화부 장관에 취임한 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2000년대까지 박물관 1,000개는 있어야 하고 출판 박물관은 필수”라는 말에 평소 고서(古書) 수집에 힘써 ‘새 책 팔아 헌 책 산다’는 말을 듣던 그에겐 이 말에 크게 고무돼 1990년 대한민국 첫 출판 전문 박물관인 삼성출판박물관을 열었고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만파식적 소리가 들린다’는 이 장관의 축사를 듣고 펑펑 울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박물관은 한 나라 문명의 척도”라는 지론을 바탕으로 1999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박물관협회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회원 기관 1,000개를 훌쩍 넘긴 협회의 명예회장으로 “우리 경제가 어느날 갑자기 성장해 강국이 된 게 아니듯, 수천 년 문화적 저력이 있어 현재 대중문화도 가능하고 그 뿌리에 출판이 있다.”고 강조한다. 2009년부터는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을 맡아 워싱턴D.C 주미대한제국 공사관 환수 및 소대헌·호연재 고택 등은 물론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는 근현대사 건축물인 보성군 보성여관의 관리 복원을 시작으로 시인 이상의 옛집과 향토사학자 윤경렬 선생 옛집 매입, 울릉도 도동리 일본식 가옥 보존 및 관리 등의 의미 있는 활동을 해왔다.
3년 전에는 50여 년 전 인사동에서 ‘서울 변두리 집 두 채 값’이라고 구입해 소장 해오던 ‘가례집람’ 책판 9장 등 활자본과 달리 대체 불가능한 목판 인쇄 장치 원본 54장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에 기증해 그간 ‘이빨 빠진’ 채 흩어져 있던 책판들이 비로소 치열 고른 완제품으로 채워져 후대와의 공유가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을 때 값어치 있는 것”이라는 평소 그의 철학을 실천했다 김종규 이사장의 택배 속 편지는 오늘따라 “기억이라고 하는 건 기록으로 갖고 있으면서 실제 모습을 기억 창고처럼 해놔야 하는 거예요. 숭례문, 경복궁,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종묘도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누려야 하는 역사인 거죠.”라는 어록과 평소 “동구 밖 당산나무도 보존해야 할 유산”이라고 강조했던 그의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관이 가슴에 울림을 준다.
이뿐 아니라 “조선시대 감귤이 귀하던 시절 제주 목사가 상감마마께 감귤을 진상했다”면서 “제주 목사의 마음으로 상감마마께 진상한 것”이라는 택배 선물의 변(辯)에 감동과 늘 유머와 해학, 낭만이 있는 김종규 이사장의 삶에 엄지척으로 응원한다.
끝으로 어제 전남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희생되신 분들께 비통한 심정으로 애도와 조의를 표하고 유가족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2025년 을사년(乙巳年) 새해에는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 답전부(答田父)에 정도전이 전라도로 유배 갔을 때, 늙은 농부가 그에게 “대체 왜 그 자리에 있는가?”라고 뼈아픈 말로 했던 풍자를 누군가는 꼭 곱씹어봤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