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극 <피와 씨앗> 원작자 롭 드러먼드 “극장을 떠날 때 이야깃거리,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게 진정한 연극”
[인터뷰] 연극 <피와 씨앗> 원작자 롭 드러먼드 “극장을 떠날 때 이야깃거리,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게 진정한 연극”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8.05.28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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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기법 활용한 한국 공연 프로페셔널해, 윤리적 문제에는 정답이 없다”

두산아트센터 space 111에서 다음달 2일까지 공연되는 연극 <피와 씨앗>은 장기 이식을 놓고 벌이는 가족간의 치열한 갈등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큰 선(善)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근거는 있는지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옳다고 판단하는 상식의 기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의 첫 한국 공연에 발맞춰 <피와 씨앗>의 원작자인 롭 드러먼드가 한국을 찾았다. 그는 배우이자 극작가, 연출자이며 이번 공연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정식으로 그의 작품이 한국 무대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무엇인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족들. 그리고 자신이 자라난 과정을 독백으로 들려주는 어린 ‘어텀’. <피와 씨앗>은 이들의 갈등을 통해 희생과 선을 우리에게 질문한다. 이 극은 특별하게 어떤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떻게 될 지는 관객에게 맡겨놓았다. 이는 ‘관객과의 소통’이 진정한 연극의 중요 요소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윤리의 딜레마’, ‘관객에게 질문’ 이러면 뭔가 심오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만난 롭 드러먼드는 무척 유쾌한 사람이었다. 이 유쾌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심오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코미디 배우로 나오면 제격일텐데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의 이야기 속에서 비로소 롭 드러먼드의 본심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연극팬들에게 앞으로 주목받을 작가인 롭 드러먼드가 소개하는 <피와 씨앗> 이야기다.

▲ <피와 씨앗> 원작자 롭 드러먼드

한국 관객들에게 본인의 작품이 정식으로 소개된 건 처음이다. 직접 한국 공연을 보기도 했는데 한국에서 첫 공연을 하게 된 소감과 공연을 보면서 느낀 점을 듣고 싶다.

다른 문화권에서 내 작품이 소개되는 것이 영광이다. 연출이 상당히 프로페셔널했다. 특히 영국 연출가와는 다르게 영상 기법을 사용한 것이 흥미로웠다.

영국에서는 영상이 없이 무대에서 그대로 진행했는데 이번 한국 공연은 무대를 넘어 무대 뒤 영상으로 극을 표현했다. 그렇게 장면이나 인물의 이야기를 처리한 것이 영리한 연출이었고 상당히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영국 관객과 한국 관객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한국 관객이라 더 유의해서 보라는 생각도 안 했다. 물론 문화적인 차이도 있고 여러 다른 점이 있겠지만 인간이라는 비슷한 점이 있지 않나. 내가 느끼기에도 비슷한 반응이 나온 것 같다. 만약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면 오히려 내가 더 놀랐을 것이다.

한국 연출가를 통해 희곡 전반에 깔린 고대 켈트 신화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켈트족의 전통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이들에겐 다소 낯설게 다가올 수 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켈트족의 토속신앙적 요소와 기독교적 요소의 결합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켈트의 토속신앙과 기독교가 은근히 결합되는 부분이 있다. 기독교 최대의 축제인 크리스마스도 토속신앙의 축제가 바탕이 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양쪽의 다양한 부분이 결합된 것이 이 극의 내용이 된 것 같다.

켈트족은 하나의 신을 섬기기보다 대지의 신, 물의 신 등 자연의 신을 섬기는 것이 전통인데 이번 작품은 그 중 ‘밀알의 여신’, ‘대지의 여신’ 등 여성신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고 볼 수 있다.

극중 어린 딸의 이름이 ‘어텀(autumn, 가을)’이다. 극중에도 나온 것 같지만 그 이름의 의미가 궁금하다.

여러 의미가 있다. 먼저 극중에는 나오지 않지만 어텀 엄마의 이름이 ‘썸머(summer, 여름)’였다. 중의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도 있고 극중 어텀이 태어난 시기가 추수기인데 추수기에는 ‘밀알의 여신’을 위한 희생이 이루어진다.

추수를 감사하며 여신에게 희생양을 바치는데 본래는 여자 아이를 희생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극에서도 나오지만 밀짚 인형에 잼을 묻히는 형식으로 드리기도 했다. 어쨌든 여자 아이든 인형이든 무엇인가의 희생이 이루어진다는 점, 또 어텀이 희생을 통해 탄생했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다. 

극 중 인물들이 욕설을 자주 하는데 그 욕설이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이라기보다는 억지로 감정을 표출하는 듯한 소리로 들렸다. 의도가 있는 것이었는지?

역으로 당신에게 질문을 하고 싶다. 연극을 봤을 때 당신을 포함한 한국 관객들이 욕설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나? 충격적으로 보였나? 아마도 연출에서 이런 의도를 보인 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극작을 했을 때는 욕설에 어떤 의도를 넣거나 부자연스러움을 유발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봤다.

어텀을 예로 들면 열두살의 어린 소녀인데 이 어린 소녀가 본인이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욕이든 뭐든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욕을 많이 하는 것이 조금 부자연스러워보일 수도 있고 충분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보호관찰관 ‘버트’는 인물들 중 유일하게 정상으로 보이지만 점차 어텀의 가족들과 똑같이 변해간다. 중간에 이모 ‘바이올렛’과의 러브라인이 살짝 나오는데 혹시 버트가 변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러브라인을 넣은 것인지?

그런 부분도 분명 있다. 버트가 바이올렛에게 감정을 느꼈는지는 나도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바이올렛이 버트를 좋아하는 것은 극에 나온 그대로고 감정을 표현하는 계기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본대로 버트는 처음에는 욕도 하지 않고 켈트족의 문화나 미신을 숭배하지도 않고 잘 알고 있지도 않다. 이는 버트의 성향이기도 하지만 한 발 더 떨어져서 볼 수 있는 인물이고 이성적이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결국 인물들의 영향을 받아 굳게 잠그던 감정이 깨지게 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버트의 인물상을 통해 감정을 과감없이, 때론 지나치게 표출한 것이 오히려 건강한 것인가, 아니면 감정을 감추고 사는 것이 더 건강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려했다. 

▲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롭 드러먼드의 작품 <피와 씨앗> (사진제공=두산아트센터)

당연시 되어온 윤리적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한다. 혹시 관객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는지? 당신이 생각하기에 '윤리의 딜레마'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보는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많은 세월동안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하려했고 그 정답을 찾으려 노력하는데 지금도 답을 찾을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은 아주 간단한 일이라도 100% 동의가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고 그걸 찾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조금 덜 서로를 해치는 방향,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추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윤리적 문제에 대한 정답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려워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나는 보고 있다.

어텀이 “하루도 채 남지 않았다”라는 대사를 하면서 연극이 막이 내린다. 이야기가 완전한 결말을 이루지 못하고 이 대사 한 마디로 끝이 나는데

답은 없다. 하지만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있다. 하나는 그 다음날이면 맞이할 밤이 없다는, 즉 어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 것일수도 있고 또 하나는 다음날 아침이면 깨어날 수 있다. 즉 어텀이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결말이 정해지지 않다는 점이 더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캐릭터 간의 이해가 상충되고 있다. 서로 남 탓을 하며 갈등을 빚는데 합의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일단 연극의 드라마적 요소를 살리려면 갈등이 반드시 있어야하지 않나(웃음). 가장 간단한 이유는 그것이고. 지금 현실 세계 자체가 증오가 가득하고 여러 충동들이 있다. 그러다보니 테러 같은 것도 일어나고 있는 게 지금이다.

앞에도 말했지만 인간은 서로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100% 동의라는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를 할 수 있는 길은 없지만 어떻게 우리가 잘 동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만약 내가 반대 의견이 있다면 어떻게 남에게 설득력있게 반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가? 맹목적인 반대가 아니라 어떤 이유와 설득력을 가지고 반대하고 상대로 하여금 왜 반대를 하는 지를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피와 씨앗>으로 돌아가자면 신장 이식을 놓고 가족들이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아무도 당사자인 어텀의 의견을 묻지 않는다. 설사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당사자에게 물어봐야하지 않는가? 어텀에게 질문을 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 

여러 사람이 다투기보다는 당사자에게 먼저 의견을 물어봤으면 간단하게 끝날 수 있는 문제였다. ‘너 살고 싶니?’ ‘너 아빠에게 신장 받고 싶어?’ 이런 질문을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 지점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극 자체에서는 해결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들이 이 극을 보고 돌아가면서 남아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

작가가 추구하는 '진정한 연극' 혹은 ‘연극의 진정성’은 어떤 것인지?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대단한 의미를 가지거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다. 어떤 문제에 대해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 가장 최고라고 본다. 극장을 떠날 때 생각거리, 이야기거리를 남겨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혹시 지금 구상 중인 작품이 있다면

2010년 베이징에서 있었던 교통혼잡을 모티브로 작품을 쓰려 한다. 베이징에서 100km가 넘는 구간에서 교통혼잡이 있았고 그 혼잡이 열흘간 이어졌다는 데 이 내용을 뮤지컬 형식으로 구상하려한다. 

베이징을 찾은 여행객들이 열차 안에 10일간 갇힌 상황이다. 나올 수도 없고 나오면 상황이 더 심각해질 수 있는 그런 현실이다. 그렇게 열흘간 모르는 사람들이 다 갇힌 채로 지내야하고 그러면서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