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서울문화재단(대표 이창기)은 큰 규모의 조직개편과 인사를 단행했다. ‘新대학로 시대를 열다!’라는 컨셉으로 대학로극장 ‘쿼드(QUAD)’의 개관을 알리며, 오세훈 시장도 참석한 대대적인 개관행사도 진행하였다.
필자는 현재 예술청 민·관 거버넌스의 민간위촉직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고, 대학로극장 쿼드와 관련하여 2021년 9월 책임연구원으로 서울문화재단 「공공극장위원회 준비단 제안사항 연구」를 수행했다. 해당 연구는 「2019년 서울문화재단 공공극장TFT」부터 이어져 온, 「공공극장위원회 준비단 제안사항(2020)」을 체계화하고 추가 연구를 통해 현 극장 쿼드의 필요성과 운영방안에 대한 제안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조직개편을 통해 서울문화재단이 예술청을 인식하는 관점과 극장 쿼드 운영 세팅을 보면서, 서울문화재단 민·관 거버넌스가 기각될 수도 있겠다는 전조를 보았다.
「서울예술인플랜」과 예술청
2016년 서울시는 「서울예술인플랜」 5개년 정책을 수립하였다. 당시 일본 모리재단 도시전략연구소의 도시경쟁력 측정결과, 서울은 총점으로 6위를 보였다. 하지만 서울시 도시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것 중에 ‘예술인 활동’부문은 세계 40개 도시 중에서 35위를 차지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서울예술인플랜」을 통해 서울 예술인 사회 경제적 현황과 복지지원 현황분석을 기반으로 2030년까지 예술인이 활동하기 좋은 10대 도시 조성이라는 비전과 8개 핵심사업을 선정하였다. 그중 하나가 예술청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해당 비전에 따르면, 정책의 경로의존성을 가지고 「2025 서울예술인 플랜」, 「2030 서울예술인 플랜」이 5년 단위로 수립되어 운영되어야 한다. 「서울예술인플랜」은 진보의 정책도 보수의 정책도 아니다. 현장 예술인의 민생을 해결하는 정책이다. 이 계획을 통해 서울문화재단이 대학로 동숭아트센터를 매입할 수 있는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단지, 서울문화재단 사무실 확장을 위해 청사로 매입된 건물이 아니었다.
2020년에는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구원과 다양한 거버넌스 주체들이 모여 「2025 서울예술인플랜」 수립을 위한 실태조사와 대토론회가 뜨겁게 진행되었다. 여기서 ‘예술인 거버넌스 공간으로서 예술청을 활성화’한다는 미션을 도출하였다. ‘예술청은 공간기반 조성사업’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닌, ‘민·관 정책 거버넌스 기반 조성’이 핵심이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예술인이 활동하기 더 좋은 도시가 될 수 있도록 그 당사자가 되는 예술인이 적극적으로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조성해보자는 사업인 것이다.
이런 기반은 뚝딱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행정이 포용력을 가지고, 제도의 경계에서 민·관이 함께 참여하여 제도적 실험을 해보는 ‘예술인 정책 스타트업 영역’, ‘현장 예술인 정책 특구’, ‘예술인 자치의 영역’ 등으로 인식해야 한다. 현장에서는 이 실험이 반 발작 진전하여 좋은 사례로 남을 수 있다면, 전국의 문화재단에서도 좋은 선례로 참고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예술인이 창작이든 복지든 지원의 대상이 아닌, 참여의 주체로 말이다.
정책도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하나의 순환을 겪는다. 정책의 씨앗을 뿌려야 할 때가 있고, 정책을 밀어주면서 왕성하게 키워야 하는 시점이 있고, 열매가 맺어졌으면 추수를 하고 일몰시키며 다음을 위한 새로운 씨앗을 준비하는 시기가 있다.
이번 서울문화재단 조직개편과 <3대 전략, 10대 혁신안>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해보게 된다. “설마, 예술청을 공간기반 조성사업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설마, 의사결정권자는 「서울예술인플랜」 정책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까?” 앞에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예술청이라는 민·관 협력 거버넌스 기반 조성사업’으로 뿌려진 씨앗이 이제 막 싹을 틔워 내부직원들과 민관 위촉직 위원들이 의기투합하여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데, “왜 저렇게 가지치기를 했을까?” 그 간의 정책 흐름을 이해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에는 청력이 약해진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하게 한다.
인사는 대표이사의 고유 권한이라는 말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인사는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은 책무가 따른다. 책임자(Director)는 결국 방향(Direction)을 결정하는 것이다. 공공 영역의 책임자는 자신이 결정한 방향에 대한 설명책임의 의무가 있다. 왜, 이렇게 결정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결정의 단면을 보면 ‘新대학로 시대’는 한국 예술계에 상징적인 지역인 대학로를 기반으로 정책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거버넌스라는 방향보다 ‘공간기반 클러스터 조성사업’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거버넌스는 단지 많은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서 얘기하는 네트워크가 아니다. 「더 큰 거버넌스」라는 프레임은 모호하고 촌스럽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문제를 협력적으로 함께 결정하며 풀어가는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협력적 민·관 거버넌스에 ‘인사라는 고유 권한’을 커튼 뒤에서 위계적으로 적용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 “이럴 거면 하지를 말지”가 되는 것이다. 협력적 거버넌스가 기각될 때의 전조는 보통 이렇게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2020년 「공공극장위원회 준비단 제안사항」과 극장 쿼드(QUAD)
서울문화재단 대학로 극장 쿼드가 1차 제작·유통극장을 표방하며 개관했다. 보통 광역 예술정책에서 대표 공공기관은 지원사업을 하는 광역문화재단과 극장을 기반으로 하는 문예회관으로 양분되어 있다. 서울의 경우 서울문화재단과 세종문화회관으로 그 역할을 나누어 운영한다. 그래서 광역문화재단이 직접 공공극장을 운영하는 사례는 별로 없다. 지원사업이 핵심인 광역문화재단과 광역을 대표하는 문예회관에 종사하는 인력의 전문성도 차이가 있다. 그래서 광역문화재단이 공공극장을 직접 운영한다고 했을 때, 그 명분과 전문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울문화재단은 이전에 남산예술센터라는 훌륭한 공공극장 유산이 있다. 관련 연구 과정에서 남산예술센터의 주요한 성공 요인은 역대 대표이사의 긍정적 무관심과 남산예술센터 극장장과 직원들에게 운영 방향과 미학적 의사결정에 대한 자율성을 주었던 조직문화가 주요했다. 안타깝게도 여러 상황으로 남산예술센터는 일몰되었다.
해당 흐름과 맞물려 서울문화재단은 <2019년 서울문화재단 공공극장 TFT> 연구를 진행했고, 후속으로 현 극장 쿼드 개관을 대비하여 2020 <공공극장 위원회 준비단 TFT>를 구성하였다. 당시 우연 극장장과 내부직원, 남산예술센터에 애정을 갖는 다수의 현장 전문가들이 참여하였다. 이때, 극장 쿼드의 운영시스템에 대해 예술감독제, 집행위원체제, 분과별 위원회 체제 등의 의견이 있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것은 극장 쿼드의 독립성과 자율성이었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개방형 예술감독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체계를 권고하고 있다. 극장 쿼드 운영단을 별도로 독립시켜 외부 민간 극장장을 임명하여 독립성과 자율성을 통한 민·관 거버넌스를 기반으로 대학로 공공극장을 운영하는 방향이었다.
그런데 이번 조직개편에서는 독립적이었던 ‘극장운영단’을 해체하고, 예술청과 함께 대학로 공간 중에 하나로 나열하여 대학로센터실에 합쳐 놓았다. 그렇다면 “극장 쿼드의 극장장은 누구일까?”,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일까, 예술창작본부장일까, 대학로센터실장일까, 아니면 공연기획팀장일까?” 계층을 케이크처럼 몇 겹으로 쌓아두었지만 누가 극장 쿼드의 운영 방향과 미학적 의사결정을 하는지 분별하기 어렵다. 이 의사결정에서 주요한 것은 현장 예술인이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 예술감독’ 제도를 운용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광역문화재단의 대표는 극장장의 역할을 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광역문화재단 직원들이 힘을 쏟아야 하는 부분은 직영으로 하는 극장사업은 아닐 수 있다. 서울에 “세종문화회관과 25개 자치구에 문예회관도 많은데, 서울문화재단이 굳이 ‘직접’ 시민을 위한 공공극장 사업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은 “광역문화재단인 서울문화재단이 1차 제작·유통 극장의 역량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블랙박스 단관 극장으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운영의 타당성과 내부 인력의 전문성을 고려했을 때,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 광역문화재단 구성원이 ‘제작 중심 극장’ 공연기획팀으로 순환보직 될 때, 국·공립극장에 종사하는 인력과 전문 역량의 차이로 적응에 애를 먹을 수 있다. 이번 인사의 경우 기존 남산예술센터부터 전문성을 인정받아 온 인력들은 대체로 이탈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순환보직이 필요하다면 극장 쿼드는 경험 많은 현장 예술인에게 자율성과 독립성을 주면서 그 중심축을 맡기는 것이 경영의 관점에서도 합리적으로 보인다.
광역 서울문화재단이 굳이 대학로에 공공극장을 직접 운영한다고 했을 때, 존재 이유를 ‘현장 예술인이 내 집처럼 여기는 참여’에서 찾는 게 오히려 설명력을 가질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개방직 극장장으로 운영하는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이후 대학로에 중요한 공공극장에 세워졌다. 동숭아트센터의 매입은 서울예술인 플랜에서 시작되었고, 극장 쿼드도 그 흐름 위에 있다. 공공극장의 운영을 현장 예술인들의 참여로 함께 풀어가는 극장조직과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대학로라는 공간은 그것을 시도해볼 수 있는 상징성도 있다. 예술청과 마찬가지로 극장 쿼드도 ‘공공극장 민·관 거버넌스’ 기각의 전조가 보인다.
필요한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역량과 과제
개인적으로 예술청에 참여해보기로 한 이유가 있었다. 문화예술 공공기관 중 하나인 사랑하는 국립정동극장에서 제법 긴 시간 일을 했었다. 그곳에서 만난 예술인들은 대체로 제도권 내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갖고, 인정을 받으며 일하는 분들을 주로 만났다.
제도권 행정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행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퇴사를 선택했고 짧은 기간 많은 정책연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보통 연구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문제를 발견하고 진단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적 처방에 관한 내용을 작성한다. 이때, 스스로 ‘나는 제도권 밖에 있거나, 제도의 경계에 있는 현장 예술인에 대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약하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뭉뚱그려 모호한 진단과 처방을 담는 연구는 경계하고 싶었다. 예술청 운영을 위한 민간위촉직 공고가 났고, 참여를 통해 현장 예술인들과 더 많은 교감을 해보고 싶었다. 그 시간이 나를 성장시켜주리라 생각했다. 예술청은 예술인의 정책참여를 통해 당사자성을 가진 예술인 부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기획인 부족과 행정인 부족의 성장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려운 연구환경이었지만, 극장 쿼드 연구 참여를 결정한 이유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일을 통해서든 연구 인터뷰나 강단에서 만난 문화재단 직원들은 대체로 예술계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는데, 도움이 되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그들도 예술인에 대한 애정을 갖고, 민·관이 협력하는데 함께 하고자 하지만 결국 현장 예술인과 상위조직, 대표이사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여서 유체이탈 화법으로 곤혹스러워하는 눈빛을 보낼 때가 있다. 이 과정에서 쌓이는 스트레스가 클 것이다. ‘저도 같은 마음인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라는 독백이 들린다.
이들을 위해서도 예술청과 극장 쿼드는 민·관이 함께 참여하는 독립적인 운영규정 수립이 필요하다. 서울시 의회가 「서울예술인플랜」의 연장선에서 이를 독려해주고, 재단 이사회와 서울시 승인을 거쳐 이 정책실험을 안정적으로 제도화시켜 자율성을 촉진하며 필요한 책무를 구속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참여하는 민·관 구성원 모두 생산적인 갈등과 협력을 통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동료가 될 수 있다.
평소보다 긴 지면을 통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서울문화재단 예술청과 극장 쿼드에 불이 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 그 불이 크지는 않지만 커질 수 있는 불씨를 보았다. 그래서 우리 집이라 생각하고 그 불을 꺼보기 위해 소화기 한 대를 가져가 뿌려보는 것이다. 내부에 있는 직원들은 그 불을 끄지 못할 것 같으니, 다들 물 한 바가지 들고 가서 함께 꺼보면 좋겠다.
지난번 <예술청 공론장> 포럼에서 ‘거버넌스 신드롬 이대로 기각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기조 발제를 하였고, ‘반 발작의 진전’이라는 주제로 춘천문화도시센터, 성북문화재단 도서관기획팀, 부산 영도문화도시센터의 사례를 초대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예술청을 좋은 사례로 나눠보고 싶었지만, 이제 떡잎이고, 설익은 상태여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포럼 당일 조직개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 문화예술 민·관 거버넌스는 기각된 대안일까?” 아직 그렇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 서울문화재단 예술청과 극장 쿼드는 그래서 상징적으로도 중요하다. 이 정책의 씨앗을 심기 위해 많은 현장 예술인들의 참여와 시간이 쌓여왔다. 이 씨앗의 배경은 서울의 도시경쟁력 중 ‘예술인 활동’ 부문은 그 경쟁력이 낮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다.
공공기관 주도의 ‘공간조성 관점’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역량 있는 조직은 현장을 읽고, 필요하다면 정책의 방향을 전환하는 피보팅(pivoting)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밀어붙이는 뚝심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유연한 포용력을 가지고 전환할 수 있는 조직역량도 중요하다.
늦지 않았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물어보자. 행정이 문화예술을 만났을 때, 좋은 행정이란 무엇일까? ‘지원’이라는 시혜적 관점의 관성과 기존 행정의 한계를 극복하고, 좋은 민·관 거버넌스라는 대안적 유산을 쌓아볼 기회가 아직은 우리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