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영화음악은 어엿한 ‘현대음악’이다
[이채훈의 클래식비평]영화음악은 어엿한 ‘현대음악’이다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3.07.2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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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보고

클래식 음악 강연을 영화 <미션>(1986) 중 ‘가브리엘의 오보에’로 시작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가브리엘 신부님은 선교를 위해 남미 오지의 과라니족 마을에 도착한다. 과라니족은 낯선 침입자를 경계하지만 그가 연주하는 오보에 선율에 마음의 문을 연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음악의 힘을 증명하는 장면이다. 

▲영화 <미션> 중 ‘가브리엘의 오보에’
▲영화 <미션> 중 ‘가브리엘의 오보에’

‘가브리엘의 오보에’는 흔히 ‘대중음악’으로 분류되는 영화음악이지만 엄연히 예술성을 갖고 있고, 수십년이 흘러도 전세계에서 사랑받고 있으니 ‘클래식’ 반열에 포함시킬 만 하다. 현대음악은 너무 난해해서 대중과 멀어졌고, 전문가의 전위적인 퍼포먼스만 클래식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테크놀로지의 산물인 영화음악이야말로 ‘시대의 음악’으로 대중과 전문가의 벽을 허문 새로운 클래식이라 할 것이다. 영화 <미션>의 음악을 작곡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이름, 엔니오 모리코네(1928~2020)다!

인물 다큐멘터리(Portrait)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재미있다. 권성민 PD의 말대로 156분 동안 “엔니오는 천재예요”만 반복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 수 있다. 음악사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엔니오를 비롯한 쟁쟁한 출연자들이 “영화 음악도 클래식”이라는 나의 가설을 지지해 줄지 반박해 줄지 큰 관심거리였다.

영화음악은 당연히 영화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구성요소다. 하지만 영화음악은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기도 한다. 엔니오의 음악은 두 가지 역할을 충실히 해 냈다. <황야의 무법자>(1964)로 일약 스타에 오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다큐에서 “엔니오 모리코네 덕분에 내가 유명해졌다”고 밝혔는데, 이는 지나친 겸손이나 과장이 결코 아니다. 소년 토토의 영화 사랑과 감독으로의 성장 과정을 그린 <시네마천국>(1988)은 엔니오의 음악 덕분에 잊혀질 수 없는 아우라를 갖게 됐다. 그의 음악이 없는 <시네마천국>은 상상할 수 없다. 이 영화의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이 점을 흔쾌히 인정했기 때문에 다큐 <엔니오>를 만들었을 것이다. 

▲영화 <시네마천국> OST
▲영화 <시네마천국> OST

다큐에 출연한 세계적 영화감독들은 한결같이 영화에 대한 엔니오의 이해력을 찬탄했다. 그들은 “(엔니오가) 우리보다 영화를 더 잘 읽어낸다”, “우리보다 더 실감나게 주인공과 상황을 묘사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렇게 보면 영화음악은 오페라 음악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듯하다. 대본이 묘사한 장면의 분위기는 물론, 인물의 심리와 갈등을 음악으로 더 실감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감독과 협업하며 감독의 상상을 뛰어넘는 음악을 창조해 낸 엔니오 모리코네는 대본작가와 협업하며 훌륭한 오페라를 만든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 등 위대한 작곡가들과 비슷한 역할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감독의 이름보다 작곡가 엔니오의 이름을 더 쉽게 기억하는 게 아닐까.

엔니오는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배운 트럼펫을 평생 연주했고, 음대 친구들과 함께 ‘일 그루포’를 만들어 음악 실험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는 생계 때문에 영화음악을 하게 됐는데, 이를 일종의 ‘외도’로 여긴 듯하다. 방송 미술을 하는 분들이 “(화가로서) 외도를 하고 있다”고 자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음악가 엔니오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순수음악과 상업음악의 이분법이 완강하던 시절이었다. 일찌감치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음악원 스승 페트라시는 그가 영화음악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음악 동료들 중에도 그를 비방하고 폄훼하는 사람이 있었다. 엔니오 자신도 마음이 불편했는지 “10년 뒤엔 영화음악을 그만 둘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간간히 교향곡 등 심각한 음악을 쓰며 자신을 달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영화음악을 그만 두겠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됐다. 영화음악도 어엿한 예술음악이라는 걸 자기도 모르는 새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음악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될 무렵이었다. 그는 ‘정통 음악’을 전공한 사람 중 드물게 자기만의 길을 부단히 개척해 나간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를 무시하거나 비방했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너를 몰라봐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는 음악이 영화를 만났을 때 일어나는 화학작용, 그 새로운 세계를 직면했고 그 가능성을 극한까지 추구했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위해 많은 곡을 썼는데, 아버지가 연로해서 기량이 떨어지자 트럼펫 음악 작곡을 중단했다. 굳이 말로 떠들지 않은 채 아버지의 자존심을 지켜드린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다시 트럼펫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아내 마리아 트라비아 이야기도 감동이다. 영화 <헤이트풀 8>로 뒤늦게 아카데미상 타면서 그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음악 전문가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을 모두 들어주고 평가해 준 아내의 숨은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그의 음악이 감동을 줄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그의 마음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노동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안목이 삶의 큰 흐름에 함께 했고 음악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인터뷰에서 “엔니오의 음악은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음악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고 호기있게 말했다. 엔니오도 이런 칭찬이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글쎄? 한 200년쯤 지난 뒤에야 할 얘기 아닌가?” 

이 관점에 나 또한 대체로 동의한다. 200년 뒤에도 서양음악사의 중심에는 여전히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가 있을 것이며, 20세기 음악의 한 조류로 엔니오의 영화음악을 자리매김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서양음악사를 써도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음악사의 마지막 챕터는 ‘고독한 개별자’들의 실험 음악을 소개한 뒤 이와 완전히 다른 음악, 즉 시대와 호흡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은 영화음악의 대표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이름을 기록할 것이다. 아울러 그의 대표작 <미션>, <시네마천국>, <황야의 무법자>를 소개할 것이다.


*이 글은 PD저널과 동시에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