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대망의 1981년, 동독에서 열린ITI총회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대망의 1981년, 동독에서 열린ITI총회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3.08.2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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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옥의 사교와 김의경의 조직적 성격, 한국ITI 세계로 견인 역할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1981년 나는 처음으로 한국 ITI 정회원 및 임원 자격으로 동독에서 열린 ITI 총회에 참석하였다. 함께한 분들은 김정옥, 김의경, 당시 독일유학 중이던 고 김문환 후배와 동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의 우리의 임무는 아직 ITI의 이사국이 아니었던 한국을 ITI의 이사국으로 탄생시키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다. 경쟁국으로 그리스와 스페인(?) 두 나라를 따돌리면 이사국이 되는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세대가 ITI의 주역이 되기 이전에는 여석기, 이병복, 차범석 등 몇몇 선생님들이 헬싱키, 마드리드 등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면서 ITI라는 공연예술의 국제적 모임이 서유럽중심에서 확장돼 가는 당시로, 비로소 한국의 존재를 알리며 우리나라 안에서도 세계기구의 모임 속에 한국 공연예술을 인지하는 초기시대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ITI의 존재와 이름도 그 당시 공연예술의 어떤 분야보다도 깨어있고 인구도 많았던 연극인이 중심이 되었던 듯하다.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라는 이름도 <극>이라는 단어 속에 공연예술이라는 함축된 용어로 쓰인 것 같다. 중국의 원극, 곤극, 경극 등 오늘날 오페라라는 말로 대신하는 용어가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며 도입된 게 아닌가 싶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는 1948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여덟 개 나라의 공연예술계 대표들이 모여 결성하면서 그 본부를 UNESCO 산하에 두어 파리가 본부역할을 했다. 각 나라가 2년 또는 3년마다 국제공연예술제를 주최한다. 미래의 공연예술의 향방과 그 대처 방향도 논의해 보는 명실공히 공연예술인들의 국제적 문제 제기의 장을 여는 세계적 대표기구다. 그 동기와 목적은 세계대전을 사전에 막지 못한 공연예술인들의 양심과 회한으로 탄생한 국제적 모임과 행사다. 극단의 국제적 오해가 전쟁이라는 큰 사건을 불러오기 이전에 예술교류와 논의의 장을 통해 최악의 참사를 막아보기 위한 예술인들의 큰 의지와 희망에서 탄생한 국제기구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ITI 총회 겸 페스티벌에 참석한 나는 이사국이 되기 위한 목적에 부응하는 친교를 하기에 무리가 없었음을 지금도 자랑으로 생각한다. 첫째는 독일어가 능통하여 동구권 대표단들과 독어와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었으며 그동안 동독의 연극잡지 der ZEIT>를 통해 꾸준히 동구권 연극의 발전상을 섭렵한 것이다. 그들 동구권 예술가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어 대화의 막힘이 없었음이 큰 재산이 되었음을 지금도 기쁘게 생각한다. <호기심의 진정성>이 삶의 인도자가 된 셈이다.

우리는 일주일간의 회의와 역동적인 독일 연극관람, 또한 그들이 안내하는 독일 지역의 관광을 마치며 즐거운 가운데 일주일의 회의를 끝내고 어렵게 생각했던 이사국으로의 등극도 쉽게 해냈다. 동독에서의 한국 ITI의 이사국 등극은 1987년 이스탄불 총회의에서 대한민국이 드디어 집행위원국으로 발돋움하게 했다. 그 목적을 위해 ITI 한국본부 부회장이었던 고 김의경 부회장은 만반의 준비를 하여 한국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등 세계 회원들의 환심과 인기를 모으는데 최선을 다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결과 당시한국본부 회장이었던 김정옥 회장이 인기투표에서 최고점을 획득했고 한국 ITI는 세계인의 이목과 사랑을 함께 받으며 급부상하게 된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프랑스 유학을 일찌감치 끝내고 돌아와 무대의상가 이병복 선생님과 공동대표를 하며 <극단 자유>를 꾸려 한국연극계의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김정옥선생님은 매우 지혜로운 행동가였다. 특유의 재치와 매력으로 서양 공연예술인들의 호감을 끌어모으는데 남다른 재주가 돋보였다. 당시 보통한국남자들의 권위적이며 둔탁한 태도와는 대조되게 유럽중심, 그것도 불어권 중심의 공연예술인들과 친해지는 특별한 재주를 가진 선배님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에 비해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출신이며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 <실험극단>을 이끌며 한극연극계의 큰 바람을 일으키며 연극계의 중심을 이끌고 있던 김의경은 김정옥 선생님과는 다르게 조직과 기록의 가치에 방점을 두며, 한국 내에서 ITI의 활동을 잘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81년 동독에서의 회의와 페스티벌에 이어 지금의 튀리키에의 수도 이상의 역할을 하며 동서양과 맞닿아 있으며, 양 대양의 문화의 교류를 이어오던 매력 있는 도시 이스탄불에서의 ITI 총회에는, 의도적으로 10명의 대원들을 이끌며 한국 ITI가 대거 참석하였다.

지금 기억으로 당시 함께 갔던 분들은 무대의상가 고 최보경님, 현대무용가이자 현 예술원회원인 박명숙님, 극단 <미추>의 대표이며 한국 연극에 마당극과 전통의 뿌리를 심는데 큰 족적을 남기며 예술원 회원이 된 손진책님, 우리나라의 큰 무용가인 국수호님, 고 김문환 서울대 미학과 교수님 등 다양한 대원들이 함께하여 지중해권 문화에 흠뻑 빠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이스탄불에서의 ITI한국본부 위원들의 분위기와 행보는 김정옥 한국본부 위원장과 한국본부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200여 명의 세계 ITI 회원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이사국의 지위를 뛰어넘어 1997년 남미 베네수엘라에서 열리는 ITI 총회에서 김정옥 한국본부 회장이 세계본부회장으로 뽑히는데 큰 주춧돌이 되었다. 더 나아가 1997년 아시아권 최초로 <세계 ITI 19회 총회와 ITI 국제 페스티벌>을 유치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비로소 한국 ITI가 세계기구의 한 축으로서 아시아의 한 거점으로 등극하는데 확실한 발돋움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