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젊은예술가상 수상자] 김성훈 김성훈댄스프로젝트 대표 “춤의 바다를 항해하던 배에 이름을 새기고 키를 잡다”
[서울문화투데이 젊은예술가상 수상자] 김성훈 김성훈댄스프로젝트 대표 “춤의 바다를 항해하던 배에 이름을 새기고 키를 잡다”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4.03.06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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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P무용단 창단멤버…“전미숙·미나유 교수님은 인생의 스승”
8년 간의 아크람 칸 무용단 활동, 예술활동의 근간이 되다
몸의 언어 표현해 주는 ‘사람’, 작업에서 가장 중요
“언젠가 꾸려질 ‘김성훈 무용단’과 세계 투어 꿈꾼다”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 2012 런던하계올림픽 개막식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레전드’로 회자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따온 ‘경이로운 영국(Isles of Wonder)’을 주제로 산업혁명을 거쳐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근현대사를 차례로 훑어냈다. 단순히 올림픽 개막식이라고만 부르기엔 부족했던 이 행사는,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계 주요 인사들이 모여 완성한 ‘문화의 집결체’였다. 

▲London 2012 Olympic Games Opening Ceremony - Akram Khan Company
▲London 2012 Olympic Games Opening Ceremony - Akram Khan Company

서사가 있는 3시간짜리 뮤지컬과 같았던 개막식 가운데, 현대무용가 아크람 칸은 ‘나와 함께 하소서(Abide with Me)’에 맞춰 50여 명의 무용수들과 함께 죽음과 삶,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전 세계에 묵직한 이야기를 던진 움직임의 선두에는 한국인 무용수, 김성훈이 있었다. 

장르를 아우르며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움직임으로 서술하는 김성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재학 중 2003년 LDP무용단 객원 활동을 시작해 이듬해 정단원으로 입단했다. 이후 2009년부터 2016년까지 8년 동안 영국 유수의 무용단 ‘아크람 칸 댄스컴퍼니’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2017년 창단한 ‘김성훈 댄스프로젝트’는 블랙코미디를 이용한 휴머니즘적인 작품을 지향한다. 다소 모호하고 무겁게 느껴지는 주제들을 사실적이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창작 작업을 하고 있다. 자신의 움직임을 강요하기보다는 인간 본연의 움직임을 무대화하는 작업을 가장 중요시한다. 무용수 각자 특유의 움직임을 존중하고, 주제에 따르는 일반인들의 일상 움직임들을 조사한 후 두 가지 현상을 콜라주(collage) 기법을 이용해 감각들을 서술하여 하나의 이미지 장면들을 구성하는 안무 작업을 해오고 있다. <조동>(2022)으로 2022 춤비평가상 베스트6를 수상했으며, 대표작으로는 <Self Portrait with Public Corner>(2023), <일무>(2022). <Mindseeker>(2021), <김주원의 사군자_생의 계절>(2020), <Pool>(2019), <No Flim>(2018) 등이 있다. 

스무 살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춤의 세계에 뛰어든 김성훈은 춤으로 하여금 ‘행복’한 사람이지만, ‘행복의 순간’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중이다. 그는 “현재의 행복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새로움을 갈구하는 것보다, 가진 것에서 뭔가를 찾는다면 더 좋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김성훈은 국내 및 중국, 미국, 유럽의 해외 아티스트와의 협업 활동과 영화, 드라마, 뮤지컬, 대중음악 등 다양한 공연예술 분야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창작 영역을 넓히고 안무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이슈에 자신만의 정서를 더해 대중에게 춤으로 이야기를 끊임없이 건네는 중이다. 그의 예술적 시도에 주목하며,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는 제15회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 무용 부문 수상자로 김성훈 대표를 선정했다. 김성훈을 만나, 그의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춤에 대해 들어봤다.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젊은예술가상(무용) 부문 수상자 김성훈 대표 어머니(가운데) 대리수상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젊은예술가상(무용) 부문 수상자 김성훈 대표 어머니(가운데) 대리수상

제15회 문화대상 젊은 예술가상 수상을 다시 한 번 축하한다. 공연 일정으로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는데, 미처 전하지 못한 소회와 수상 이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근황이 궁금하다.

처음 상을 받는다고 했을 땐 믿기지 않았다. 아니 사실 수상 소식이 담긴 신문을 받아 보기 전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워낙 상복이 없어서 더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서울문화투데이와의 인연도 오래됐고 문화대상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수상자 선정 소식을 듣고 그동안 수상하셨던 분들을 찾아봤다. 진짜 대단한 분들이 타셨길래 ‘나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웃음) 물론 기쁘기도 했지만, 똑바로 하라는 경고장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어 약간의 부담도 함께 느꼈다. 

올해 작업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몇 개 구체적으로 작업이 잡힌 것도 있고, 아직 구상하고 있는 것도 있다. 더불어 오는 5월에 초연할 서울예술단 <천 개의 파랑>의 안무를 맡게 됐다. 원래 순수예술 쪽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몇 년 전부터는 장르 구분 없이 다양한 작품들과 만나는 중이다. 하고 있을 땐 잘 모르지만, 지나고 보면 너무 좋은 경험이 된다. 더불어, 내가 안무 제안을 거절하면 주위에 무용수들이 무대에 설 기회를 잃게 된다고 생각하니, 되도록 거절하지 않고 하게 된다. 

직접 무대에 오르거나 안무를 창작하는 일 외에, 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데 지금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봐야 나중에 제자들에게도 폭넓은 가르침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가깝게는 현대무용 외에 한국무용, 발레 등 다른 무용 장르와의 협업부터 넓게는 뮤지컬, 연극, 영화, 드라마 등에 필요한 움직임까지 아우르며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춤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다양한 무용 장르 중 현대무용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어머니도 한국무용을 오래 하셨고, 누나도 무용을 전공해서 사실 나는 무용을 안 하고 싶었다. 연극이나 뮤지컬 연출이 꿈이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무용을) 해봤는데 재밌더라. 막연히 알고 있던 것과 직접 해보고 나서의 현대무용은 또 달랐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뒤늦게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남들보다 시작이 늦었던 만큼 엄청 열심히 했다. 다행히 이듬해 한예종에 입학하게 됐지만, 내가 대단히 뛰어나서 뽑힌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미숙 교수님과 미나유 교수님께서는 나의 가능성을 보고 뽑아주셨다고 생각한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은 했지만, 학교에 들어가서 너무 힘들었다. 어린 나이에 배우기 시작했다면 배우며 겪는 시행착오와 그 과정에서의 여러 감정들을 세세하게 기억하진 못했을 것이다. 반면, 나는 성인이 된 상태에서 새롭게 부딪히고 깨지며 배워야 했기 때문에 그 공간을 채워가던 모든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타인에게 지적을 받는 것보다, 스스로 부족한 점을 너무 명확하게 깨닫고 성장하는 일이 생각보다 버거웠다. 못했던 당시에 주변 반응과 이에 반응하던 내 감정이 아직도 어느 부분에 박혀있는 것 같다. 많이 극복했지만 그래서 아직도 타인에게 (나의 춤에 대해 먼저 나서서)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수상 당시 “항상 아낌없는 격려와 사랑을 주시는 미나유, 전미숙 교수님께 감사드린다”라고 전한 바 있다. 바쁜 와중에도 스승님들의 작품에 빠짐없이 출연하는 모습이 놀랍기도 한데, 춤 인생에 있어 스승님들은 어떤 존재이고 의미인가.

나의 춤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분들이시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선생님들의 작품을 보며 많은 영감을 받기도 한다. 더불어, 춤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 삶에서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것 같다. 인생의 어른이시니까. 단순히 춤을 배운 스승님에서, 함께 예술을 이야기하는 동료가 된 것 같다. 지난해 12월에도 미나유 선생님 작품에 출연했는데, 항상 가르침을 받던 내가 어느새 작품 참여 과정에서 함께 토론하고 나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나이, 연차가 됐음을 실감했다. 

두 교수님이 창단한 LDP무용단 이전과 이후의 현대무용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LDP는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만들어졌다. 당시 우리 사이에도 LDP 창단은 큰 이슈였다. 무용단이 만들어질 때 옆에서 도왔고, 운 좋게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단원으로 참여하게 됐다. 띄엄띄엄 활동했지만, 2020년까지 LDP에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셈이다. 여러 연령대와 함께 교감하며 많은 것들을 배웠다. 무용을 늦게 시작한 나로서는 많은 자극을 확 받을 수 있었던 LDP가 정말 소중한 공간이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한예종 무용원 졸업 후 2003년 LDP무용단 객원, 이듬해 정단원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다, 2009년 영국 생활을 시작했다. 2016년까지 8년 동안 영국 ‘아크람 칸 댄스컴퍼니’ 객원 단원으로 활약했는데, 영국 유수의 무용단인 ‘아크람 칸 댄스컴퍼니’에서의 시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아크람 칸 댄스컴퍼니에 오디션을 보고 들어간 건 아니었다. 지난 2009년 아크람 칸이 줄리엣 비노쉬와 LG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할 당시,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거기에 함께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사실 선호하는 무용단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해외로 나간 건 나에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를 이루는 예술 활동에서 가장 큰 핵심이다. 인생에서 뺄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제2의 고향이 영국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아크람 칸 댄스컴퍼니는 정규 단원, 객원 단원의 개념이 없고 프로젝트(작품)별로 단원 계약을 맺는다. 한 작품을 만나면 2년 동안 세계 투어를 돌고 4~5개 정도 했으니, 8~9년은 있었던 셈이다. 영어를 잘 못해서 대화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단원들이 가족처럼 챙겨줘서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춤이 너무 빠르고, 기존에 추던 춤이 아니라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고, 모든 연습 과정과 디렉팅이 영어로 이뤄졌기 때문에 내내 긴장을 놓을 수가 없어 심리적으로 불편하고 불안정한 상태로 몇 년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긴장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땐 힘들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치열하게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을 때 아크람 칸 무용단의 디렉터가, 사실 워크숍 이전에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는 얘길 해줬다. 2004년 SIDANCE 초청작으로 아크람 칸 무용단이 한국을 찾은 적이 있는데, 그때 LDP에서 공연하는 걸 봤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늘 항상 열심히 하면 누군가는 알아본다. 혼자라고 느껴져도,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으니 끝까지 예술 활동을 계속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내가 인식하지 못했을 때부터 나를 지켜봐 주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감동이었다.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무용)을 수상한 김성훈 김성훈댄스프로젝트 대표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무용)을 수상한 김성훈 김성훈댄스프로젝트 대표

적응에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그곳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나와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느끼게 해줬다. 처음 낯선 영국 땅을 밟았을 때부터 공항에 나를 데리러 와줬고,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영화에서나 보던 대우를 받으니 너무 신기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냐고 물어봤더니, ‘넌 영국이 처음이고, 우린 너에게 그렇게 해줄 필요가 있다’라고 답했다. 그 외에도 춤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완벽하게 만들어줬다. 기본적으로 숙소가 됐고, 아프면 바로 치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고, 페이도 셌다. 내가 한국에 너무 가고 싶다고 했을 땐 비행기 표도 1년에 몇 번씩이나 끊어줬다. 크고 작은 부분에서 많은 배려를 받으며 생활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2013년에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쉬고 싶어서 무용단을 그만둔 적이 있었다. 쉬는 동안 직접 참여했던 공연을 객석에서 보고 싶어 극장을 찾은 적이 있다. 공연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무대 뒤에서 준비하기 바빠 로비를 나가볼 일이 거의 없었는데, 로비에서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들을 만나니 너무 새로웠다. 티켓을 구하지 못해서 우는 관객들도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놀랐다. 적은 금액도 아닌 이 공연 티켓을 이렇게 간절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관객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도 받았다. 그와 동시에 ‘나 똑바로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힘들 때, 가끔은 느슨해지며 프로답지 않은 생각을 했던 지난 시간을 반성하게 됐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했을 때, 관객들은 이 공연 하나를 위해 그들의 시간과 돈과 노력을 온전히 투자하는데 퍼포머들이 대충한다면 얼마나 속상하겠나. 객석에 있는 관객들의 하루를 내가 맡고 있다는 책임감을 많이 느끼게 됐다. 아크람에서 춤적인 부분도 많이 배웠지만, 이런 경험들이 더해져 나를 성장시켰다고 생각한다. 

8년 이상 단원으로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다는 게 참 자랑스럽다. 이후 해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게 됐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쉼 없이 너무 쭉 달려와 잠깐 브레이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무용단이 2년 정도 재정비 기간을 갖는다고 했다. 8~9년을 한 단체에서 활동했으니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이제 내 걸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하고 싶었던 안무, 연출의 꿈이 사라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졌다. 

▲김성훈댄스프로젝트 <조동>
▲김성훈댄스프로젝트 <조동>

2017년 ‘김성훈댄스프로젝트’ 창단에, 아크람 칸 무용단에서의 활동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물론이다. 우선, 너무나 체계적인 무용단에 있었기 때문에 무용단을 만들지 못하는 것도 있다. 체계적으로 하지 않을 거면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나를 믿고 함께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케어하지 못할 능력이라면, 구조가 안 된다면, 무용단이 아닌 프로젝트로 운영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안무가 ‘김성훈’ 개인이 아닌 ‘김성훈댄스프로젝트’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나?

작품을 만들 때, 잘 알고 있는 주제를 정하기보다 주제를 정한 후 그 주제에 대해 공부한다. 그리고 이 주제는 세계적인 문화예술 트랜드를 파악하며 결정하는 편인데 주로 영화쪽을 많이 참고하게 되는 것 같다. 세계를 아우르는 가장 대중적인 매체라고 생각해서다. 트랜디한 부분을 설정한 후 나름대로 공부해서 (나만의) 정서가 묻어나오게끔 한다. 어떨 땐 춤에 집중해서, 어떨 땐 연출적 요소를 강조하기도 한다. 

 작년에만 열두 개의 작품을 했다. 모두 새로운 작품은 아니지만,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이렇게 다작할 수 있게 된 게, 작품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위주로 작업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없더라도, 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이 들어도 실험적인 것들을 하게 된다. 언제 이렇게 또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실력이 부족했을 때,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았을 때를 생각해보면 너무 감사한 일이 아닌가. 다만, 기회가 아무리 넘쳐나도 내가 즐겁지 않고 버거우면 할 수 없을 텐데 지금의 나는 일하는 것이 마냥 감사하고 기쁘다. 이러다 지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일이 버거워 무용을 그만둘 거였다면 애초에 지금까지 무용을 계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무용단을 만들게 된다면 아크람처럼 세계 투어를 가고 싶다. 아시겠지만, 국내에는 후배들이 설 무대가 많지 않다. 너무 잘 추는 무용수들이 많고, 그들이 춤을 계속 췄으면 좋겠는데 기회 자체가 부족하다. 나중에라도 나의 능력이 돼서 무용단을 만들게 된다면 세계 투어를 다니며, 아크람에서 내가 느꼈던 것들을 후배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예전엔 누군가의 배에 타고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면, 이제는 리더로서 이끌어보고 싶다. 

창작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은 무엇인지?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공감하며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지 않나. 무용수뿐만 아니라 테크니션, 스태프 등 작품을 만드는 모든 사람이 전부 중요하다. 내가 가진 몸의 언어를 작품으로 함께 표현해줘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주는가에 따라 작품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성훈이 안무가로 참여한 서울시무용단 <일무>
▲김성훈이 안무가로 참여한 서울시무용단 <일무>

앞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안무 창작 작업 외에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학교 졸업하자마자 2008년부터 지금까지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서울예고에서 5년 정도 했고, 지금은 한예종 실기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 외에도 소년원, 해외 워크숍 등을 통해 기회가 될 때마다 강의를 하고 있다. 

가르치려면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한양대에서 박사과정도 밟고 있다.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공부가 힘들긴 하지만 재밌다. 토론하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연구하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 수업이 짧아서 아쉽기도 하다. 한국무용을 전공하신 어머니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는데, 그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사람이 되고 싶다. 연구했던 것들이 글로 끝내는 게 아니라, 무대 위에 올렸을 땐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는 재미도 크다. 계속 배우고 싶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테크닉 적으로 수업을 많이 한다. 움직임 쪽으로. 그리고 항상 강조하는 것은 ‘내가 하는 대로 똑같이 따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만들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예술가는 어느 정도 타고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에 와서 무용을 전공할 정도면 재능이 있는 것이니, 자신을 믿고 자기 색깔을 낼 수 있는 창의성을 발휘하라고 말해준다. 자신만의 몸의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을 키울 것을 가장 강조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무용가가 되고 싶은지? 최종 목표, 지향점이 있다면?

계속 바뀐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행복했으면 좋겠다. 정확히는 행복을 잘 느끼고 싶다. 무엇이 되고 안 되고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행복한 적이 되게 많았는데 당시엔 잘 못 느꼈던 것 같다.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이라, 시간이 지나고야 알게 된다. 그게 참 아쉽다. 지난 시간을 돌릴 순 없겠지만, 지금부터라도 현재의 행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사람이 됐으면 하는 게 요즘 목표다.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것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뭔가를 찾는다면 더 좋은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