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설치, 조각, 사진 등 8점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개’와 ’잡초’를 교집합으로 비인간적 존재를 탐구하는 전시가 열린다. 두산갤러리에서는 ‘두산인문극장 2024: 권리'의 기획전시 《우리는 개처럼 밤의 깊은 어둠을 파헤칠 수 없다》를 내일(15일)부터 내달 22일까지 개최한다.
전시 제목은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의 『개를 위한 노래』(Dog Songs)의 구절에서 인용했다. 어둠 속에서도 시각과 냄새와 소리로 무수한 존재를 분별하는 개의 타고난 감각을 예찬하며, 동시에 인간-비인간 사이 종(種)의 차이로부터 오는 간극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는 이 땅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서 비인간 동물, 식물의 삶을 비추고, 인간-비인간 관계의 얽힘을 확인함으로써,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들의 ‘온전한’ 권리에 다가가기를 제안하고자 한다. 여덟 점의 작품들은 오랜 세월 이 땅에 자리잡아 겹겹이 쌓인 복수의 층위를 가진 비인간 존재들을 담는다. 작품이 그리고 있는 인간과 가장 가깝고도 흔한 존재—‘개’와 ‘잡초’라는 교집합은 대상을 담는 작가들의 시선을 거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분화되어 나타난다.
작가 고사리는 마을 공동체와 생태 텃밭을 일구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식물과 맺는 관계를 작업으로 가져온다. 작가는 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잡초를 제초하게 되면서, 인간 중심의 생태계 안에서 부적절한 풀로 정의되는 잡초에 주목했다. <초사람>(2021-2024)은 제초된 잡초들을 가져와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듯 손으로 빚어 만드는 순수한 형태의 조각으로, 인간의 생계 과정에서 소거되는 식물의 존재를 전시장 곳곳에서 상기시킨다. <땅의 별, 잡초>(2024)는 한 땅에서 자랐지만 작물과 잡초로 분류되는 식물들을 한데 수집하여 이룬 군집이다. 잡초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각 개체의 이름과 쓰임을 확인하며 이분법적인 구분을 벗어나, 개체별 다른 특성을 지닌 식물들은 생물이 본래 가진 다양성을 보여준다.
엘리 허경란의 <말하자면>(2012)에는 들어갈 수 없는 경계 앞에서 기다리는 개가 있다. 그는 눈을 맞춰오며 인간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힘껏 말을 건다. 일상 속에서 다른 생명체들이 공존하는 장면을 포착한 엘리 허경란의 영상은 관찰자에게 공존의 방식과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작품 <더 래그워트>(2023)는 영국에서 흔히 보이는 식물이자 잡초로 분류되는 ‘래그워트(Ragwort)’를 관찰한 기록을 영상과 아카이브로 제시한다. 영상은 인간의 자리와 혼재하는 식물의 자리를 비추고, 아카이브는 시칠리아 태생으로 인간의 기억 너머 존재해온 한 식물의 파편적인 역사와 래그워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갈등을 보여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권동현×권세정의 조각과 영상은 그들과 함께 지내는 개가 마주하는 일상의 단편들을 통해, 인간-비인간이 뒤엉키며 형성하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디, 도도와 만나는 방법>(2021-2024)에서 이들은 늙은 개 ‘도도’를 돌보기위해 구매한 반려동물 케어 로봇에 개에게 익숙할 가족의 얼굴을 얹은 ’세디’에 접속한다. '도도'보다 더 낮은 시각과 조악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세디’로의 변신은 친숙하면서도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돌봄 그리고 반려인-반려견 사이 익숙한 관계에 틈을 낸다. 집 안의 바닥과 침대는 그들이 함께 뒹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 <여자와 개, 개와 여자>(2023-2024)는 그러한 일상 속 개와 인간이 뒤엉켜 보내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아픈 개를 집에서 돌보며 촬영했던 사진 속 형상을 본 떠 만든 조각은 친밀함을 나타내는 동시에 유사한 듯 서로 다른 동세들로 유동하는 관계를 암시하며, 계속될 듯한 여운을 남긴다.
박화영의 <소리>(1998)는 떠돌이 개를 담은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이다. 작가는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떠돌이 개에게 일종의 유대감을 느끼며, 차도 위를 건너고 있던 첫 만남의 인상으로부터 그를 ‘제이워커(Jaywalker)’라 이름 짓는다. 거듭 마주치는 개를 필름카메라로 촬영하고, 드로잉 등으로 기록하였다.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축적된 사진들을 다시 비디오 캠코더로 촬영하고, 내레이션과 소리를 입혀 영상 작품으로 완성하였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마치 비밀코드 같은 소리는 인간세계의 학습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두 개체가 교감하는 신호이다. 작품은 대상을 연민과 동정이 아닌, 도시를 살아가는 한 독립적인 존재로서 바라보며, ‘개’와 ‘나’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넘어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단절된 개체들 간의 소통을 향한 바람을 담는다.
전시는 무료로 관람 가능하며, 자세한 정보는 두산아트센터 홈페이지(https://www.doosanartcenter.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