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텍스트 없이 색으로 쓰인 시”…갤러리현대, 김기린 《무언의 영역》展
[현장스케치] “텍스트 없이 색으로 쓰인 시”…갤러리현대, 김기린 《무언의 영역》展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6.07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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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갤러리현대 본관
"김기린의 작업 언저리에는 늘 시와 음악이 있었다"
"사진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촉감, 관람객이 능동적으로 뜯어봐야 하는 작품"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단색화의 선구자, 김기린 화백의 작고 이후 첫 개인전이 열린다. 갤러리현대는 김기린의 개인전 《무언의 영역 (Undeclared Fields)》을 내달 14일까지 개최한다. 지난 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는 평론가 사이먼 몰리(Simon Morley)가 참석해 이번 전시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나눴다.

▲사이먼 몰리가 한지에 작업한 작품 앞에서 김기린 작품의 입체감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평론가 사이먼 몰리가 이번 전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다. ⓒ김연신 기자

시의 운율을 담은 회화

학부시절 한국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던 김기린은 1961년 생택쥐페리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 작가는 프랑스에서 랭보와 말라르메의 시를 탐독하며 시 집필에 몰두하던 와중, 언어의 한계를 고민하게 되면서 미술사 강의를 듣게 된다. 그렇게 그림 공부를 시작하고, 1965년 디종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콜보자르)에서 로저 카스텔(1897~1981)의 지도를 받았고, 이어 1971년에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한국의 단색화가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 전인 1972년, 파리에서 열린 개인전이 주목을 받게 되면서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나의 최종 목적은 언제나 시(詩)였다. 발레리(Valéry), 랭보(Rimbaud), 말라르메(Mallarmé), 그리고 그 세대의 시인들 거의 모두를 좋아했다……나는 계속해서 시 작업을 했으나, 글이 아닌 그림을 통해서였다. 항상 시적인 이미지를 추구한다. 내 정신은 한국적이고, 내 작품은 항상 나의 정신을 반영한다. 시인은 가장 정확한 단어들만을 사용해 본질을 구현해야 한다라는 의식을 그림의 매체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오고 있다.” — 김기린 (2018)

이러한 작가 개인의 삶이 묻어나듯, 무수한 점들이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작업에서는 시와 같은 리듬감을 읽을 수 있다. 평론가 사이먼 몰리는 이러한 김기린의 작업을 두고 “텍스트 없이 색으로 쓰인 시”라고 칭한다. 전시 제목 《무언의 영역 (Undeclared Fields)》은 사이먼 몰리의 에세이 「무언의 메시지 (Undeclared Messages)」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김기린 작가 (1988). Courtesy of Kim Guiline Estate and Gallery Hyundai
▲김기린 작가 (1988) (사진=갤러리현대)

이번 전시는 단색적인 회화 언어가 구축된 시기인 1970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연작부터, 1980년대부터 2021년 작고할 때까지 지속한 〈안과 밖〉 연작 중 대표적인 캔버스에 유화 작업과 더불어 생전에 공개된 적 없는 종이에 유화 작업까지 40여 점의 작품과 그가 직접 창작한 시, 아카이빙 자료를 한자리에서 소개한다. 1층에는 캔버스 작업이 주로 전시되며, 2층에서는 아카이빙 자료를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전시장 1층에는 검정색 안료를 반복적으로 쌓아 올림으로써 급기야 빛이 수 많은 색점이 서로 달리 굴절되는 김기린의 1970년대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흑단색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시작으로 2000년대까지 지속된 〈안과 밖〉 연작이 서로 다른 거리감을 가지고 설치되어 만들어진 생경한 빛의 진동으로 전시 공간을 채운다. 2층은 작가 생전 전시에서 공개된 적 없을뿐더러 한국 전통 문창호지를 연상시키는 한지에 유화 작업을 중심으로, 유학 초기 시절 작가가 직접 창작한 원고지에 쓰인 시가 최초로 공개된다. 또한 전성기 시절의 유화 소품은 물론, 시인에서 전업 미술품복원가로 생계를 꾸리는 동시에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의 파리 시기 아카이브 자료 또한 함께 전시된다. 

▲김기린, 안과 밖, 1997, 종이에 유채, 81 x 61 cm.
▲김기린, 안과 밖, 1997, 종이에 유채, 81 x 61 cm. (사진=갤러리현대)

음악과 같이 입체적인 리듬감

김기린의 작업 언저리에는 늘 시와 음악이 있었다.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과의 인터뷰에서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에서는 노란색을,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는 회색,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을 들을 때면 녹색이 떠오른다"고 술회한 바 있다. 김기린의 회화는 음악이 추상 언어를 통해 본질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음악적인 맥락을 지향하는 지점이 있다.

시나 음악과 같은 리듬감을 만드는 그의 작업 방식을 살펴보자면, 먼저 가로와 세로의 선으로 그리드를 형성한다. 이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작은 단위의 네모꼴 속에 비슷한 크기의 색점들을 일률적으로 찍고, 그 위에 색을 수십 번씩 반복해 칠하고 쌓아 올린 후 작품을 완성한다. 감상자는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 발생한 움직임과 에너지를 포착하고, 한 점 한 점 쌓여 생성된 수십 겹의 붓 자국의 흐름을 따라 작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작업해 간 흔적을 읽어 가게 된다.

200호 이상의 대작을 할 때, 작가는 똑같은 점을 찍어 내려가면서 다음 겹의 점을 찍을 때까지 유화가 마르기를 기다려 1~2년의 세월이 흐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조금씩 다른 두께와 깊이의 색점은 빛이 닿아서 튀어 나가는 파장의 속도가 각각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화면을 마주하면, 운율감 있게 이어진 광채가 다른 다채로운 도톨도톨한 점들의 변주를 감상하게 된다. 빛과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김기린의 작품을 사진이 아닌 입체감이 느껴지는 실물로 감상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 유학 시절 작가가 프랑스어 공부를 위해 쓰던 노트가 2층 전시장에 진열되어 있다.
▲프랑스 유학 시절 작가가 프랑스어 공부를 위해 쓰던 노트가 2층 전시장에 진열되어 있다. ⓒ김연신 기자

이날 사이먼 몰리는 "김기린의 작품은 멀리서 관조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이리 저리 다각도로 뜯어 봐야 한다"라며, "관람객의 능동적인 참여를 요하는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김기린의 회화에서 눈으로 느껴지는 촉감을 설명해주듯, 작가는 회화의 표면을 '일종의 살아 숨 쉬는 온도와 습도와 빛의 파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피부'라고 표현한다. 비슷한 그리드 패턴에 같은 붓으로 똑같은 점을 찍는다고 하지만, 매 순간마다 붓 터치는 같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낸 도톨도톨한 질감은 빛의 파장이 닿는 속도와 강도에 영향을 미쳐 감상자로 하여금 섬세한 지각의 세계로 인도한다. 얼핏 봐서는 그저 단순한 색면인가 싶지만, 가볍고도 잔잔한 음의 진동이 촉각적으로 전해진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김기린이 회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그려진 시를 감상하며, 명료하면서도 풍부한 단색조 화면으로 명상과 울림을 선사하는 감각적인 그의 작품들과 공명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